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책의 제목은 <베니스의 상인>이지만, 상인인 앤토니오가 독자적인 주인공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어폐가 있다. 그렇다고 바싸니오나 포셔만이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이다. 내가 봤을 때 <베니스의 상인>은 '인간 군상', 그 자체가 주인공으로 보였다. 우리는 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방향성과 군상의 다양성을 모두 체험할 수 있다.
<베니스의 상인>을 역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부에 대한 적개심이 만연했던 중세로부터 막 벗어나기 시작한 초기 자본주의 근대의 정신이 담겨있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중세 때까지만 해도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는 미개하고, 악하다고 보여지는 경향이 다분했지만, 더 이상 그런 신본주의적 사상은 사회를 지배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자본이 너무나도 중요해진 혼란한 사회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기독교적 가치, 사랑의 갈등에 대해 깊이 있게 통찰해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데, 극의 가장 마지막 장면이 이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늘 새로운 시대를 맞는 ‘과도기’에는 기대감과 미련이 동시에 밀려오기 마련이다. 앤토니오는 생명과 ‘재산’을 돌려준 포오셔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는데, 재산을 목숨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는 그의 이 한마디에서도 수반되는 가치이며, 독자들은 이를 현대가 아닌 당대의 시대적 감수성을 장착하며 읽어 갈 필요를 뼈저리게 느끼는 바이다. 또, ‘반지’라는 사랑, 또 ‘약속’의 상징, 거래의 중요성, 재판 절차가 아직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시기에서의 ‘법’의 의미 여러 측면으로 비판, 또 있는 그대로 반영되어가며 작품을 이룬다.
게다가, 극중 등장하는 고보 노인의 일화는 희극적 요인으로 삽입됨으로써 셰익스피어가 독자들로 하여금 관점을 넓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극의 진행에 있어 중요한 내용만 읽지 말고, 극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것 같다. <베니스의 상인>의 고보 노인은 <오이디푸스>의 나레이터나 코로스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보 노인은 시력이 좋지 않아 자신의 아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의 아들인 란슬럿은 그런 아버지를 속이고 다른 사람인 척한다. 이는 일종의 복선으로 작용하여, 포오셔와 니리서가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바싸니오와 설리어리오를 속이고 재판관과 서기인 척을 하는 것을 예기한다. 우정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여인들은 이를 통해 귀여운 훈수를 두는 듯하다.
포오셔와 제시카로 본 여성상
제시카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해방을 하지만, 포오셔는 여전히 순응적인 해방에 그치는 면이 다분하다. 또, 이들의 해방에는 모두 남성이 관여하는데, 제시커는 아버지 샤일롯의 속박을 자발적으로 벗어나며, 유대인이었던 자신이 기독교 사회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하게 된다. 포오셔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인해 본인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지 않았다. 바싸니오가 그녀의 남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운이나 요행에 가깝지, 다른 남성이 납상자를 골랐다 하더라도 포오셔는 그 남성과 결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한 바싸니오와 앞으로의 나날을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연적인 해방이면서 원하는 삶의 시작이 되어 그녀를 찾아왔다.
반면, 포오셔는 본인을 '온순한' 여성이라 자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행동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특히 바싸니오가 그녀에게 청혼할 자격을 부여받고, 그녀를 선택한 이후 그녀는 아버지의 그림자 밑, 그의 사후에는 그의 유언 밑에서 살아오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당시 ‘남장’과 신분 위조라는 위험하고도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자신의 남편과 그의 친구까지 구해낸다. 그에게 우정이 어떤 의미인지를 지켜봤던 그녀는 사랑도 그만큼 소중하니, 당신의 여자를 대할 때도 노력하라는 것을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몸소 보여준 것이다. 적극적인 인물로 탈바꿈한 그녀는 오히려 납상자를 우연히 ‘잘’ 집어낸 바싸니오에 비해서 더욱 주체적이다. 바싸니오는 늘 아내의 재산을 이용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지만, 그의 이러한 선택은 극 중에서 포오셔의 변화를 이끌어낼 도구로 작용한다.
정의와 법을 인식하는 방법
재판은 공정해야 함이 지당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누군가에게는 억울한 재판이다. 어떤 재판이든지 입장에 따라 기쁨과 속상함이 오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재판은 사실 굉장히 주인공-중심적으로 진행되는 스토리의 권선징악을 위해 설정되어있다. 샤일록은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 눈엣가시였던 앤토니오를 제거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는 사실은 분명 좋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법적’으로 잘못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앤토니오는 법이라는 질서 위에서 체결된 약속을 위반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내놓지 않고 있으니 샤일록이 보기에는 마땅치 않다. 살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피가 나는 것이 당연한데, 피 한 방울 없이 가져가라 꼬투리를 잡아 강요하고, 그를 끊임없이 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회유하는 재판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따지고 들면, 결국 샤일록이 약속받은 살과 빌려준 원금은 최소한만치도 받지 못한 것이니 이 또한 거래상에 오류가 존재한다.
게다가 포오셔, 즉 앤토니오의 편에 서있는, 전혀 중립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재판관으로 위장을 해 개입한 형국이니 이 얼마나 불공정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이 재판에는 ‘정의’가 작용하는데 결국에는 샤일록의 못된 심보를 호되게 혼내주고, 바싸니오와 앤토니오의 우정, 그리고 포오셔와 바싸니오의 사랑을 지켜내게 만드는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지점에서 그렇다. 셰익스피어는 처음부터 사람의 목숨을 저당잡은 거래는 우화의 소재로 삼기 적절치 않고, 이를 극복해내는 인물들의 이야기만이 독자들에게 ‘정당히’ 환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한편, 벨몬트의 법정과 베니스의 법정에서는 유사점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인물들의 개입으로 결국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유사하다. 또한, 복잡하게 얽힌 규칙이나 절차 없이 스토리의 개연적인 진행을 위해서 이용된다는 특징을 띤다. 그러나 베니스의 법정에서는 채권자인 샤일롯과 채무자인 앤토니오 사이에 사전에 증서 계약이 체결되어있었고, 벨몬트의 법정에서는 포오셔와 바싸니오 사이에 ‘반지를 잃어버리면 안된다.’라는 부부 사이의 약속만이 있었다. 이 약속에는 실물 증거가 남지 않으니 일종의 구두계약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당연히 벨몬트의 법정에서는 재판관이나 서기, 즉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베니스의 ‘엄중한’ 법정에서는 표면적으로 이 모든 것을 관리, 중재하는 재판관(으로 위장한 포오셔)이 있었으니 이들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베니스라는 겉보기에 대도시에서는 ‘형식’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벨몬트는 이런 무의미한 질서에서 벗어나 조금은 융통성 있는 법이 일종의 소규모 도덕처럼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인생이라는 무대, 각자라는 역할
사도 바울과 샤일록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한 관점에서 크게 차이를 보이는데, 샤일록은 이 둘을 뚜렷하게 구분하여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모두 같은 ‘인간’이고, 언제든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믿는다. 샤일록은 본인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어떤 피해의식을 갖는 모습도 보이는데, 바울은 처음에는 유대교인으로서 기독교 박해에 일조하다, 진정으로 신의 음성을 듣게 되면서 신념에 있어 변화를 맞는다. 이곳은 기독교가 가진 이웃 사랑의 측면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바울의 방식과 샤일록의 방식은 세상을 보는 시선에서 출발하여 결국 자신을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지로 이어져 간다. 자신이 차별받아야만 하는 이 사회와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결코 더 나은 미래를 불러오는데 일조하지 않는다.
극의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앤토니오는 절친 바싸니오가 곧 짝사랑하게 된 여인 포셔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는 것을 이미 들은 상태인 것인지, 우울한 모습을 보인다. <베니스의 상인>은 그 자체로 ‘우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성은 극중 내내 이어지며 아주 중요한 지점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 암시된다. 앤토니오는 이야기한다.
“나는 세상을 세상으로 생각할 따름이오. 하나의 무대, 누구나 한 가지 역을 해야 하는 무대인데 내 역은 울적한 역이오.”
이 또한 작자인 셰익스피어가 인생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를 단적으로 제시한다. 수많은 개인의 개별성은 인생이라는 ‘극’에서 각자 다르게 드러나고, 삶에서 역시 주인공과 주변인, 기쁜 이와 슬픈 이가 존재한다는 시선을 가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는 자신의 ‘선택’이 모여 결정되는 측면도 있지만, 이 모든 극을 연출하는 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허무함은 앤토니오를 문득 찾아오고 있었다. 내 생각에 이 역시 그를 울적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품 앞부분에 드러나며 작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포오셔의 재치있는 도움으로 인해 끔찍한 심판으로부터, 그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바싸니오를 마주하고, 모든 일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기에 그가 울적할 이유는 없다. 사랑과 우정의 소중함을 느끼고, 죽을뻔했지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울하기보다는 재판관이 포셔였다는 반전에 호탕한 웃음을 드러낸다.
책을 읽는 내내 이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대개 ‘우연’이라 말하기 쉽다. 특히 상자를 고르는 장면에서 포오셔가 비록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녀이지만, 노래라는 행위를 통해 바싸니오에게 꼭 겉보기에 아름다워야만 진정한 사랑인 것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부분을 떠올려보라. 그녀는 그가 다른 화려한 금, 은 상자가 아닌, 가장 초라해 보이는 납상자를 고르도록 유도하는 재치를 보여준다. 극 전반에 걸쳐 포오셔는 막간의 지혜를 발휘하는 여성상으로 드러나는데, 이 순간 역시 자신의 운명을 유도리 있게 개척해나가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우연적으로 궁극의 행복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어쩌면 누군가, 혹은 '운명'의 장난이 개입되어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이끌어온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순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