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Autism), 틀림과 다름의 경계선

영화 <템플 그랜딘>과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

by young


자폐증(Autism)을 바라보는 시선엔 두 가지가 존재한다.

“틀림”과 “다름”.


이 뻔한 이분법적 구도는 논쟁거리를 부른다. 답은 뻔하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과연 이들이 다르기만 한 것일까? 남의 시선이 아니라 오롯이 자폐증 환자의 시선에서 본 자폐증은 분명 ‘틀림’으로의 의미로 다가오는 부분을 수반한다. “왜 남들과 같지 않지?”, “왜 나에게 세상은 친화적인 공간이 될 수 없는 것이지?”, “포근한 포옹이라는 것, 온전히 조용한 상태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지?”. 그들은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해줄 수 없다. 의사조차도 생물학적으로 그들의 질병을 진단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줄 수 없는 법이니까.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자폐증 환자의 삶을 다루고 있었다. 영화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2010)의 경우, 실제 인물을 모티프로 한 픽션, 영화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Life, Animated, 2017)의 경우, 실제 인물을 그리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자폐증은 “사회 기술, 언어, 의사소통 발달 등에 있어서 지연되거나 또는 비정상적인 기능을 보이는 발달 장애”를 의미한다. 즉, ‘자폐인’이란 남들과는 매우 다른 요소, 쉽게 비정상적인, 장애적 인물로 수용되기 쉬운 특질을 많이 갖추고 있는 이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발달은 과정적인 요인이다. 절대로 결과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발달에서 장애를 겪는다고 해서, 사회 속에 구성원이 되어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법은 없다. 물론, 많은 방해물이 그들을 막아설 것이며, 사회적인 시선은 그들로 하여금 원하는 말,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제지한다. 나 또한 많이 부끄럽게도, 아무런 편견 없이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적은 잘 없었던 것 같다. 공공장소나 대중교통, 학교 내외로 자폐인들을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들에게 내 기준에서의 ‘정상’적 행위를 요구한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매우 편협한 결정이었다.

그런 작고 작은 결정들이 모여서 ‘나’라는 사람을 만들고, 실제는 그렇지 않음에도 어딘가 피해받았다고 생각하는 미숙한 이기주의를 알게 모르게 형성해온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순수한 반성에 의한 것이며, 반성하지 않는 자보다 적어도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자폐증을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발생하는 다름의 의미와 자폐인에게 자폐증이 어떤 틀림의 원동력으로 변화하는지, 그래서 앞으로 삶을 대할 때 나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등을 영화 <템플 그랜딘>과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의 시사점을 통해 적어 나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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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과 타인: “다름”의 의미


<템플 그랜딘>에서 “다름”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까? 템플의 과학 선생님과 어머니는 “Different, never less”라고 이야기한다. 즉, 다른 이들과의 우열관계 속에서 템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문화상대주의적 측면에서 그녀의 다름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 어떤 어머니가 자식이 못났다는 평판을 받길 원할까. 게다가 템플의 어머니는 당시로써 상당히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하버드를 졸업하였다. 자신의 딸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 조차도 그녀에게는 크나큰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일종의 죄책감으로, 일종의 좌절감으로 그녀는 같은 자식도 다르게 대할 수밖에 없는 사실에 울분했다.

자폐증은 누구의 탓인가? 애초에 ‘탓’이라는 명사구를 이런 맥락에서 사용해도 되는가에 대한 질문은 생략하겠다. 굳이 모든 것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구시대적이다. 당연히 그녀의 어머니나 아버지, 선생님, 조부모님, 의사, 그 누구에게도 책임은 없다. 이는 자폐증을 수직적인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치료의 대상으로 여겼을 때나 드러나는 회피의 무책임일 뿐이다. 자폐증은 일종의 자아이다. 자아에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듯이, 템플의 자아에는 다른 모든 요소와 함께 ‘자폐’라는 특징이 ‘더’ 포함되어있을 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까. 그것을 인간의 나약한 정신력으로 버텨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봐줄 수는 없을까?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의 오웬 역시 남들과는 다른 아이다. 그전까지 너무나 행복한 어린 시절이 보내오던 그에게, 그가 3살이 되던 해, 발달장애와 자폐 증상이 찾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희망을 잃지 않고, 그를 천천히 기다려 주기로 결심한다. 그에게는 유달리 눈에 띄는 특징 하나가 있는데, 바로 애니메이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대사를 그 자체로 외워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그의 이런 능력은 그를 남들과는 다른, 좋은 의미로 비범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는 결여된 발화, 대화 능력을 애니메이션 대사로는 대체 충족할 수 있었기에 스스로에게 역시 이는 감사한 일이었을 것이다.

디즈니가 마법을 부린 것일까. 그에게 찾아온 이 행운은 다른 모든 불운의 그림자 위에 뜬 한 줄기 빛이었고, 이 영화에서 그의 부모가 이 빛을 놓치지 않고 잘 가꿔나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는 영화의 줄거리가 되어 우리에게 제시된다. 오웬은 마냥 의존적으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일종의 ‘자립’ 형태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금전적인 수익 활동과 자폐인들과의 영화모임을 주도해가면서 본인의 ‘타자화’를 역으로 이용해간다. 타자화란 단지 남들로부터 수동적으로 분리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다름은 나의 일부이다. 능동적 독립을 통해 내가 살아갈 방식은 내가 정한다는 마인드로 오웬이 사고할 수 있게끔 그 모든 밑바탕, 환경을 제공해준 부모님의 노력은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템플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처음 오웬에게 보인 문제에 대해 인지했을 당시 죄책감과 무력감, 절망감을 모두 느꼈던 그들은 문제를 그저 문제시하지만은 않았기에, 기회의 전환으로 삼았기에 지금의 행복과 함께하게 되었다.

같은 상황에서도 행복하지 않기를 선택한 이들과 오웬 가족이 다른 이유는 단 한가지로 수렴된다: 가진 것을 보는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보는 것.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은 이 시대의 교육자료로서, 많은 자폐인과 그들의 부모를 위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더 나아가서 자폐인의 비범과 독립 가능성에 대한 고찰의 지점이 되어왔다.



자폐증과 자폐인: “틀림”의 의미


나는 템플이 아니고, 오웬이 아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가 그들이 될 수는 없고, 그들이 내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그들의 눈을 빌려 세상을 바라보고, 잠시나마 그들이 되어보려 한다. 남들이 위로한답시고 하는 “다르다”는 말이 사실상 얼마나 가소로울지를 감히 예측하고자 한다. 템플은 솔직하다. 감정표현의 정도가 절대 계산적이지 않다. 사실, 계산적일 수 ‘없’다. 발달장애는 자연스럽게 사회성의 부족함을 가져오고, 이것은 그녀를 ‘별난’ 사람으로 규명하게 만든다.


이전에 이 현상은 ‘다름’이라는 명목하에서 아름답게 포장될 수 있었지만, 지금 나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템플은 소가 정해진 방향으로 잘 이동하게끔 돕는 ‘조임 장치’에서 어떤 위안을 얻는다. 사람의 눈은 마주치기 힘들고, 사람의 손은 닿기를 거부하지만, 소들과는 그 어떠한 장벽 없이 편안한 교류를 할 수 있던 그녀는 본인이 ‘소’와 유사하거나 그들과 같은 종족이라고 느낄 때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는 듯하다. 그녀의 탁월한 수학적 사고, 설계 실력으로 그녀는 이 조임 장치가 비-자폐인인 다른 학생들에게도 편안함을 준다는 실험 결과를 도출해냄으로써 그녀의 능력과 취미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물론, <템플 그랜딘>이 “감동 실화”라는 타이틀로 홍보되기는 하다만, 매우 좋은 운을 타고난 그녀를 모든 자폐인으로 대표하는 시도는 미시적이며, 많은 것을 간과한다. 모든 자폐인이 템플 같았다면 내가 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안함이라는 감정은 상대적이다. 절대적으로 편안하다는 것은 존재하기 힘들다. 조임 장치 속에서 템플이 느낀 것이나, 그녀의 학우들이 느낀 것은 모두 상대적인 편안함이다. 그러나 템플은 그것을 절대적인 것에 가깝게, 학우들은 상대적인 것에 가깝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학우들이야 다른 곳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지만, 조임 장치도 ‘나름’은 편하다는 공감의 차원에서 템플의 편안함을 임의적으로 함께 해준 것이다. 그러나, 템플은 다른 곳에서 편안함을 쉽게 느껴본 적이 없다. 예상할 수 있듯이, 그녀는 조임 장치 속에서만 편안함을 느낀다.

그녀가 그것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이 틀린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감정을 절대적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남들에게는 ‘다름’이, 스스로에게는 ‘틀림’이라는 인식이 찾아온다. 템플이 이에 대해 어떤 결핍감을 느끼는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발생할 여지가 충분하다면 논의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자폐인은 장애와 명석함이라는 양날의 검을 모두 지녔지, 바보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패턴으로 세상을 인지하고, 그림으로 연결하는 부류가 존재하는데 템플 역시 이에 속한다. 그녀는 기존에 있던 비인도적인 가축 시스템에 불만을 가져, 본인만의 대안 설계도를 만들어낼 정도로 유능했다. 어떻게 본다면, 남들의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는 것은 좋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 우리는 비인도적인 세상의 틀림은 잘 인식하면서, 이것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실천하는 힘은 매우 부족하다.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소위 ‘깡’을 가진 몇몇 이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고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템플 역시 동물학자로서 그녀의 도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고, 이것이 그녀에게 있어 조금은 남들이 본인을 보는 방식으로, 즉, 스스로를 ‘다름’의 방식으로 여기게 만들었길 바라게 된다.

오웬 역시 상대를 고려하는 대화 방식이나, 형식적인 인사치레, 자연스러운 행동 양태를 갖추기 어려웠지만, 그 말 한마디를 하기 처음에는 누구보다 힘들었지만, 결국에는 말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자폐인과 자기효능감 사이의 상관관계는 거리가 먼 이야기 같이 들릴 수 있지만, 이러한 ‘가능성’과 ‘선례’를 선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면 꼭 그렇지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세계에 영감을 가져다주는 이러한 실화는 영화를 통해 긍정적인 방식으로 유통되고, 또 비판받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템플과 오웬은 사실 사랑받길 원했다. 그 누구도 그들이 원하는 사랑을 줄 수 없었고, 그것이 그들이 자기 자신을 틀렸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지 몰라도, 결국 그들이 이뤄낸 성취는 꼭 성공이 아니더라도 성장과 성숙으로 다가와 모든 모호성을 해결하게, 세상을 되려 쉽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름은 처음부터 혼자이다. 그러나 틀림은 방향성을 갖는다.

틀릴 줄 아는 용기는 더 나은 본인을 만들게끔 격려하고, 한번 틀렸던 부분은 평생에 걸쳐 잘 틀리지 않게 된다. 꼭대기에 선 사람은 내려갈 일밖에 남지 않지만, 밑바닥에 있던 사람에게는 올라갈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다. ‘스스로’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꼭 그들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기에, 그렇지 않은 우리가 배려해야 한다는 맥락적 정보와 전제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무분별한 오지랖은 이미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며, 더 큰 흉터만을 부르는 법이다. 어찌 됐든 자폐인은 본인도, 그의 주변인도 쉽지 않은 과정을 걸어가게 만들며, 몇 번 넘어지더라도 일어날 잠재적 힘을 제공한다.



발상의 전환점: ‘부러움’이라는 문제


이렇게 나는 자폐인이 가진 ‘다름’에서 오는 평등한 시선과 ‘틀림’에서 오는 포용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들에 대해 어쩌면 부러움의 감정이라는 것도 경험할 수 있었다. 아마 지나가던 아무개는 내 이 부러움을 규탄할지 모른다. 소위 “약올리는” 것이나, 미친 것이 아니고서는 이런 망언을 감히 뱉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불행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찾아와 삶을 갉아먹고, 어느 누구도 행복의 척도를 객관적 기준으로 가늠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템플과 오웬은 보편 이상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부모님의 관심과 돌봄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렇게 금전적으로, 또 애정과 환경의 차원에서 부족함 없이 넉넉했기에 그들이 남들과 거의 엇비슷한 수준, 혹은 그 이상으로 갖춰진 삶을 분유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들에게 충분함이란 우리와는 다른 모습으로 작용할 것임은 분명하다. 아무리 부모가 충분한 사랑을 주고 싶어도, 일단 잘 먹이고 입히며 특수 교육을 행하고, 그들이 주는 불편함을 참아내고 대화로 그들과 연결되어있고자 하는 시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비자폐인 중 그들과는 정반대의 환경, 즉 부유하지도 않고 부모가 부모 자격을 갖추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들은 어떨까? 물론 이들은 어디가 불편하거나 아픈, 생득적 환자로서 출산되지 않았다. 그러나 삶 자체는 그들에게 고통이 되어 점점 그들을 옥죌 것이다. 차라리 아파서 병원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수도 있다. 가정 폭력과 방임은 수많은 비행 청소년을 낳고, 이것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이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이를 깊게 생각하지 않고 남의 일로 취급해 버리고 만다. 그 수많은 아이는 다행히 그것을 잘 극복하고 바람직한 성인이자 사회 구성원이 되어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다른 선택으로 본인을 더욱 비참함 속에 몰아넣은 자들은 템플과 오웬 같은 “운 좋고, 행복한 부류”를 보며 눈을 질끈 감을지 모른다. 그런 질투를 느껴도 되는 것인가. 설마 내가 그 흔하다는 “인간쓰레기”인가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이해하기보다는 감정의 전이를 겪을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아픔을 감당하라고 요구하면 막상 도망칠 것이 뻔함에도 스스로의 모든 생각의 흐름은 조절 가능한 차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쉽게 망각된다. “템플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였다면 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나도 이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망상,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다. “아무도 모른다”. 또, 더 최악의 경우는 자폐인이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나쁜 가정에서 태어난 이들이다.

아마 그들은 우리가 인식할 새도 없이 우리 세계 속에서 “버려진 자”가 되어 중첩된 사회적 소수자로 여가는커녕, 최소한의 생존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것조차도 죄의식으로 작용하며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묵인하고, 또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도와줄 수 없어”, 혹은 “나도 힘들어” 같은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템플 그랜딘>의 ‘템플’과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의 ‘오웬’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게 되는데, 그 ‘느낌’들 중에는 당연한 안타까움만이 수반되지 않는다. 자폐를 바라보는 외부의 범상식적인 시선과는 또 다른, 개별적인 독특한 시선이 작용하는 지점이 분명 발생한다. 틀림과 다름의 경계는 사실 모호하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인지할 수 있다. 타인이 그들을 향해 “틀렸다”는 시선을 쏘아댄다면 분명 그이는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지만, 자폐인 본인이 하는 이야기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렇게 자폐증을 타인이 바라봤을 때의 관점과 자폐인 스스로가 바라봤을 때의 관점으로부터 틀림과 다름의 사유적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었다. 그 경계선을 넘나드는 시도는 일종의 반성의 식은 땀으로, 혹은 크나큰 자기 만족감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나는 비자폐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나를 ‘정상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되려 자폐증 진단을 받은 누군가가 나보다 몇 배는 더 정상적일지 모른다. 그 기준을 “상식적 보편”이라고 둔다면, 그 ‘상식’과 ‘보편’이 어디서 정의되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정상인의 척도와 비정상인의 척도는 자폐인의 척도와 비자폐인의 척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한다.


불행과 행복은 ‘자폐’와 ‘비자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며, 대응될 수 없는 모든 개별적인 작용들을 인식하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내게 주어진 척도와 환경, 부모, 능력, 자아, 그리고 삶에서 기쁨을 찾고, 슬픔을 극복하고, 아픔을 치유하며, 행복을 만끽하는 태도는 중요하다. 때때로의 기분은 곧 태도가 되어서는 안되며, 스스로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내가 생각한 최선의 방책이다. 나는 내가 자폐인이 아닌 것에 감사하다. 어떤 자폐인은 본인이 자폐인인 것에 감사할 수도, 불만을 가질 수도, 오히려 극복할 역경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템플과 오웬으로부터 얻은 생각의 전환점, 그리고 자식을 어떻게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해갈 수 있는지에 초점을 두어 내 미래를 잘 대비하고 계획할 것, 내 자식이 만약 템플과 오웬 같은 어려움의 축복을 받게 된다면, 그들의 자아가 절대로 망가지지 않게 지켜주면서도 자신이 직접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좋은 부모가 될 것, 이 두 가지를 바랄 뿐이다.



영화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2010)

영화 <인생을 애니메이션처럼>(Life, Animate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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