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웨이킹 라이프>, <서치>
영화는 책과 닮아있다. 둘 다 시각적인 자극을 이용하고, 내러티브의 구성을 맥락적으로 파악하게 만든다. 이 둘은 미디어로서 연결되어있는데, 모든 매개되는 것, 그리고 그 매개 현상은 모두 미디어다. 책은 서사와 인물을 매개하고, 그것과 다시 책 밖의 독자로 매개해낸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책과 영화는 심지어 다른 작품들과도 관계 맺으면서 요즘 떠오르는 ‘멀티버스’를 생성하기도 한다. 영화가 인물과 인물, 감독과 인물, 감독과 관객, 관객과 관객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미디어'라면, 그런 의미에 잘 부합하는 영화들이 여기 존재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웨이킹 라이프>(Waking Life, 2001)와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영화 <서치>(Searching, 2018)는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매개되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과정을 제공함으로써 관객으로서의 ‘나’와도 제대로 마주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닌, 책처럼 능동적으로 '읽는' 것에서 오는 새로운 의미 또한 여기 이곳에서 화두에 오른다.
영화 <웨이킹 라이프>와 <서치>는 매개적 특성이 강조된 영상 매체 작품이다. 영화가 그 자체로 매체라는 외재적 현상을 뛰어넘어, 영화의 내용과 서사에조차 본질적으로 ‘매개’, 즉 ‘Media’가 표출되어있기 때문이다. 먼저 <웨이킹 라이프>부터 살펴보자. <웨이킹 라이프>는 기본적으로 꿈을 주제로 한다. 주인공이 알 수 없는 꿈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깨도 깨도 깨어날 수 없는 꿈속에서 유영하는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관점을 제시하는 주인공은 존재하지만, 여러 명의 집단으로 대표될 만한 주연 인물들을 꼽기는 어렵다. 그들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해대고, 주인공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답을 찾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을 미디어라고 볼 수 있을까?
‘현실’과 ‘비현실’을 잇는, ‘깨어있음’과 ‘잠들어있음’을 잇는 것이 꿈이라면 이것 역시 미디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라는 미디어 속에 꿈이라는 미디어, 그리고 또 그 꿈속의 꿈을 꾸는 주인공은 여러 매체를 오가며 사람들과 ‘대화’라는 매개 방식을 취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도 상대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보통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은’ 뉘앙스로만 제시될 뿐이다. 본인 역시 이러한 꿈의 끝도 없는 무한 굴레에서 벗어날 방식을 찾기 위해 대화의 주체인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바로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꿈들이 있었을까? 우선, 주인공은 실존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마주하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교실에서 거리, 카페테리아로 장소를 이동하며 그의 주장을 경청한다. 또, 자유 의지의 논점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는 학자와의 만남에서는 누가 보아도 ‘꿈’이거나 비현실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모습이 드러난다. 사람의 몸이 대개 물로 이루어졌다는 말을 할 때 몸이 갑자기 투명해지면서 보이는 물이 차오르는 과정이나, 팔과 머리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보이는 근육과 뇌가 엑스레이로 투영된 듯하게 보이는 장면들은 모두 이러한 차원에서 꿈같고, 또 ‘애니메이션’적이다.
그가 일렁이며 모호한 움직임을 보이는 인물들을 따라 같이 옮겨지고, 갑자기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사람을 보고도 그저 넘어가거나 전등불을 끄려 해도 자기 손으로는 절대 끌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는 이 모든 것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아, 쟤 아직도 꿈속에 있네”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애니메이션의 특징을 이용해서 이런 표현을 전부 그래픽으로 가능케 했다는 외재적 각성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꿈을 대체할 수 있는 말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까 현실에 대립되는 비현실이라는 개념으로 꿈을 설명한 바 있었는데, 비현실을 조금 더 구체화한 가상현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면 어떨까.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같은, 그러나 절대로 현실과 똑같지 않고 현실을 추구하는 와중에 그것을 초월한 것은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으로 특정될 수 있다. ‘VR’(Virtual Reality)은 ‘가상’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다. 주인공이 실제로 저런 여러 명의 인물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구성했어도 듣는 이에게는 비슷한 인사이트를 제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드러나는 내용을 다 덮어버리고도 남는, 꿈이라는 ‘허무함’은 그 실하게 꽉 채워진 철학적 사고의 여정을 대비시켜 더욱 빛나도록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 매개적 특성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이 영화의 제목을 ‘Waking Life’라고 이름 지은 이유 역시 왜 주인공이 꿈에서 깨어나지(waking) 못하고 있는지, 왜 구체적인 ‘ES’(Establishing Shot) 없이, 왜 감탄사를 연발하며 식은 땀을 닦는 주인공의 모습 없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지는 인생과도 같은 꿈의 연속을 표현했는지를 수긍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라는 우울한 푸념을 자주 사용하고는 한다. 그럼 “도대체 사는 게 무엇 같아야 하는데?”라고 반문하는 비인간적, 혹은 비공감적인 대답 말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은 “꿈이라고 별반 다를 것 없어, 오히려 너가 살아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드디어 느끼게 해줄거야”일지 모른다.
기존 연구를 읽으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문장이 하나 있다. “<웨이킹 라이프>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계속 떠돌지만 정해진 목적도 없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인식의 여정을 이어간다. 즉 사람이라는 섬을 찾아다니는 현대판 오디세우스의 지적(知的) 버전인 셈이다.” 목적이 없더라도 살아갈 수는 있다. 그리고 깨어나고 싶어도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 하나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삶이자 꿈이고, 꿈은 삶을 반영하기에 그 속에서도 인간적 규칙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디세우스 역시 자신의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장장 20년 동안 주변의 섬들과 트로이 목마 전쟁까지 겪으며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여정 자체는 목적 때문에 의미있기 보다도, 그 자체로 여러 가지 내재적 본질을 보여준다. 삶을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은 다시 삶으로 귀결되며 여전히 지적으로 충만하고픈 주인공의 마 속 욕구에 대답해준다. 기억하지 못하면 꿈이고, 기억하면 현실일 것이라는 고정관념 역시 이곳에서는 적용되지 못하고 허공에서 부서지기만 한다. 꿈을 기억하고, 현실을 벗어나 표류하는 주인공은 끝까지 애매모호하기만 한 영화의 결론 속에서 하늘이 비추어지는 과정은 그가 현실과 비현실을 떠나 삶과 죽음이라는 기로에서 깨어나있지 않은 상태라면 그것이 꿈을 꾸는 것이든 죽는 것이든 사실 보이기에는 같은 차원으로 다가온다는 인간적 관점의 역설을 대변하는 식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영화 <서치>는 그 제목처럼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아버지가 컴퓨터, 랩탑, 폰, CCTV, E-mail 등의 디지털 공간을 오고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말 그대로 이 영역 안에서만 존재하는 인물들의 서사는 우리가 이미 영화라는 양식으로 외재적으로 매개된 작품을 내재적으로 매개해서 관람하게 만든다. 주인공이 화면을 보고 있는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감독은 보는 이 역시 같은 화면을 바라보게 하여 마치 영화를 보는 나와 영화의 주인공이 상대편에 서있는 프레임이 아닌, 같은 방향을 향해 서있는 새로운 구도를 창출해낸다. 영화는 어디를 프레임화하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입장과 관점,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의외로 굉장히 객관적인 분위기를 띤다. 왜 그럴까?
인간은 보통 디지털 세계에서 말해지는 것들을 신뢰한다. 아니, 맹신한다. 사실 그리 하여서는 안된다고 늘 주장하는 것도 인간이면서, “이 사진 아무래도 조작된 것 같아”라고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도 인간이면서, 모순적이게도 그러한 결과물들에 즉각 ‘일희일비’하는 것도 인간이다.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조금씩 그 인식에도 변화가 생기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우리는 보는 것에 의존하는 성향을 버리지 못하기에 디지털화된 문서, 사진, 영상의 힘은 강력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딸을 찾기 위해 그녀와 관련된 인물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조사하는 방식으로 주변에 사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연락을 돌린다. 그는 이 와중에 자신도 몰랐던 딸의 여러 정보나 정서 상태, 그리고 자기 주변과 그녀가 자기 모르게 관계 맺고 있었던 방식을 알게 되며 정작 “나는 아내를 잃었지만, 여전히 딸과 사이좋은 아빠야”라고 생각했던 지난날들을 송두리째 의심하게 된다. ‘몰랐던 것’과 ‘이제는 아는 것’ 사이 역시 이 영화에서 매개되는 디지털 공간에서의 정보력, 그리고 감정선으로 묘사된다. 그가 한 걸음씩 디지털 정보 세계에 빠져드는 과정은 얼마나 그가 자기 방식대로만 딸을 사랑했고, 제대로 대화조차 한번 시도하지 않았는지를 반성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한다. 또한,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 진실을 마주하면서 또 다른 오해를 얻기도 하는데, 이렇듯 꼭 잠깐 보이는 것이 헛된 감정만 증폭시킴으로써 사실관계에 있어서 전부만은 아님이 역시 주된 메시지로 전달된다.
그는 딸이 쓰던 이메일 주소를 해킹하고, 딸이 마지막으로 폰을 사용하였던 위치를 파악한다던지 하는 추적과정을 고스란히 관객과 공유한다. 우리는 그에 따라 같이 그녀를 찾아가는 것에 몰입하여 마치 내가 컴퓨터로 무언가를 입력하고, 검색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하는 등 흥분도는 최상이 된다. 그에 비해 영화는 전반적으로 정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매개 과정은 오로지 랩탑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심지어는 인간과 인간이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I-message’나 CCTV 속에서 촬영된 모습으로만 장면에 드러난다. 매개라는 키워드로 이번 영화를 연결해본다면, 이곳 역시 ‘그냥 볼 수 있는 것을 한번 거쳐서 보게 하는 것’, 혹은 ‘그냥 볼 수 없는 것을 알고 보니 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서치>가 보이게 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만약, 이 영화의 장르가 Laptop Cinema가 아닌 일반적인 미스터리-추리 영화였다고 가정해보자. 주인공인 아버지는 딸을 찾기 위해 컴퓨터든, 발로 뛰든 어떤 방식들을 동원해 그녀를 추적하고, 관객은 이를 제 3자로서 관찰하는 구도였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아버지가 본 것에 대한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그 감정을 되려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을까?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차갑다. 인물과 인물 간의 감정 교류나 뜨겁게 울부짖는 사람의 모습을 주된 장치로 내걸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것은 카메라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고 있으니, 사실상 관객과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주인공이 얼마나 분노하는지, 또 얼마나 슬픈지를 동화되어 체험케 하는 요인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원래 무엇을 최소화하려고 하는 전략은 그것을 최대화하려는 전략과 극단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감정적 개입을 빼고자 한다면,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인물의 마음까지 한발 더 나아가 상상함으로써 더욱 극적으로 그 감정에 동화되려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동양계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초반의 장면은 어머니의 질병을 발견하면서부터 감정적 클라이맥스로 다다르지만, 음량은 줄어드는 배경음악이나 휴지통에 가족과 행복했던 순간을 지워내는 지극히 ‘디지털적’(digitalized)인 움직임으로 드러나면서 슬픔을 삼키게 한다.
마치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영화 <사울의 아들>(Son of Saul, 2016)에서 우리가 2인칭 시점(?)에서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게 사울의 등 뒤만 쫓아다니는 감독이자 관객으로서 카메라가 기능했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카메라가 영화의 서사에 온전히 녹아 들어가 있기에 그 비현실적인 경계를 허물고 “너와 나는 같은 화면을 보고 있는거야”라고 끊임없이 말해주는 듯하다. 그렇지만 게임을 하는 것처럼 조작적이지는 않다.
영상통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는 딸에 대한 걱정이 어린 아버지의 얼굴은 발신자 화면만 확대된 남아있는 영상으로 보여지고, “엄마도 자랑스러워했을 거야”라는 말 한마디를 보내는데 고민하다가 결국 보내지 않는 ‘로딩’ 창으로부터 우리는 인물의 감정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가운 매체는 인간적이게끔, 그리고 인간적인 장면은 객관적으로 변모하며 끊임없이 매개 속의 매개를 거치는 이 영화 역시 영화 <웨이킹 라이프>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미디어적인 특성을 도출해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 <웨이킹 라이프>는 로토스코핑 기술로 현실을 재조작하고 있다. 로토스코핑 기술이란 “실제 촬영한 영상을 기반으로 하여 각각의 프레임 위에 다시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을 바탕으로 몇 개의 프레임을 추출하여 덧그리고 이를 애니메이션 키 프레임으로 사용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왜 이러한 기법을 사용해야만 했을까? 주인공이 꿈속을 부유하는 이야기는 여러 시공간을 타고 전개되는데, 그 와중에 관객에게 매우 친숙한 지점으로 보이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같은 감독인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6)의 특정 장면에 선과 움직임을 따서 애니메이션에 그대로 삽입한 부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꼭 작가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멀티버스의 유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들은 영화와 비영화, 현실과 가상현실을 오가면서 여전히, 있는 그대로 이어진다는 뜻이 내재된 것이 아닐까.
이는 주인공을 관객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우리가 영화 속에 잠시라도 잠식될 수 있게끔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이런 로토스코핑 방식은 영화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연주자들이 호흡을 맞추며 연습을 하는 장면에서도 명확하게 느껴질 정도로 전해진다.
어떻게 매개할까? 이 영화가 어떤 식으로 서사와 우리를 연결짓는가에 초점을 맞춰보면, 우선 이 영화의 표면적인 ‘생김새’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애니메이션 영화라고 한다면, 아무리 로토스코핑 기법이든, 녹음실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장의 리얼한 사운드가 담긴 것을 다 떠나서도 매우 ‘조작적’인 기능을 수반한다는 것인데, 왜 그것이 필요했을까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이 세계에서 필터링되지 않는 현실은 없다.
심지어는 영화를 떠나서 매번 논란이 되는 딥페이크 기술이나 허위사실유포를 조장하는 가짜뉴스들은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고, 심지어는 이제는 그닥 사람들이 이것의 위험성조차 자각하지 않는 것 같다. 영화는 이제 더이상 이전의 의미만을 갖고 존립할 수 없다. 영화는 한자로 ‘비칠 영’, ‘그림 화’를 사용해서 어떤 현상을 카메라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그려낸 ‘그림’이라는 본질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더 이상 그 비치는 서사가 내용이 아닌 도구이고, 카메라가 도구가 아닌 내용이라면 기존의 영화가 가지는 존재론적 의미는 전위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하고, 또 새로운 디지털 세계의 영화를 정의하고자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애니메이션이라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째 감상하면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실들을 몇 가지 깨달을 수 있었는데, 현실보다도 더 현실 같은 가상현실이라면, 디지털 세계보다도 더 디지털 세계 같은 현실 세계라면 우리는 더 이상 이것들을 구분할 어떤 절대적인 명목과는 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보는 것’은 링클레이터에게 주요 인식 방식으로서 확립되었으며, 이는 영화의 표면에 지속적으로 주목이 기울어지는 방식뿐만 아니라 전체에서 등장하는 분명한 표지들에 의해 명백하게 입증된다”는 기존 연구의 논점을 통해서도 역시 얼마나 우리가 시각에 영향을 받는가를 보여준다. 또 링클레이터 감독이 이것의 가치를 역이용하기 위해 우리가 거짓임을 알면서 진실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본능에 자극되는지를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그 바보 같은 헛웃음을 자아내는 순간들을 병치하는 것이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고, 실제 촬영한 것인지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 것인지 모르는 여러 방황적인 지점은 관객으로 하여금 철학적으로 애매모호한 영화의 메시지와 결부되면서 미디어되는(mediating)), 즉 매개되는 범주들을 뛰어넘어 사고하게끔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것과 비정상의 영역은 삶의 단편들이 연결되고, 갑자기 폭력을 행사해도 이상할 것 없는 공간에서의 무력화된 움직임으로 우리가 어쩌면 본다고 믿는 것들을 숭배하는 사상을 벗어나게끔 해주는 것이다.
<서치>는 파운드 푸티지 장르를 표방한다. 파운드 푸티지의 의미는 “우연히 ‘발견된(found)’ ‘영화필름(footage)’을 활용한 영상을 말한다.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필름) 조각을 배치해 작품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가깝게는 플럭서스(fluxus)와 팝아트(pop-art)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으며, 조금 더 멀리는 콜라주(collage)를 도입했던 피카소(Pablo Picasso)에게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여러 장소에서 우연히 촬영된 영상들, 억지로 계정을 오가며 발견한 기존의 사적인 자료들은 이곳 영화 속에서 콜라주처럼 연결되면서 서사를 생성하고 있다. 사람은 없고, 사람을 찍은 영상만 남았다는 의미에서 <서치>는 파운드 푸티지 자체로 보이면서도 디지털 공간 안에서 변주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한다.
사실 내용은 뻔하다. ‘알고보니 형사가 범인!’과 같은 기승전결은 수도 없이 고전적인 영화들에서도 반복된 플롯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 이 영화는 내용보다도 방식에, 즉 ‘What’보다도 ‘How’에 포커싱을 해야함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해체해서 단순하게 접근하면 편하다. 2-1에서도 언급한 디지털 세계의 거의 모든 면모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 <서치> 시리즈는 후속작 <서치2>에서도 그 양상을 이어가며 심지어는 내가 사용하지 않던 얼마나 많은 기능이 애플 전자기기나 MS에 내장되어있는지를 발견하게 만드는 일종의 PPL 효과도 첨가한다.
디지털 공간이라는 것은 미디어적인 한계와 제한 없는 가능성이라는 두 측면 모두에 해당된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데, 영화로서 가지는 랩탑-시네마로서의 기능은 우리가 이 영화를 볼 때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매 순간 의도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놀랍다. 내가 찾아낸 지점은 주인공 아버지가 잠들어있는 시점에서 특히 크게 작용했는데, 랩탑이 사용자가 터치하지 않을 시에 대기 화면으로 보이는 그래픽이 영화 프레임의 전체로 확대되어있을 당시였다. 무언가 특이한 물체가 계속해서 움직이는데, 알고 보니 배경화면의 일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딸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울린다. 이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딸이 위험한 상황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적인 사실뿐 아닌, 아버지가 지금 전자기기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 즉, ‘잠들어있다는 것’, 그렇기에 ‘지금은 밤 시간대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나는 랩탑-시네마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직관적으로 깨닫게 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영화 내에서 이런 식의 연출을 보여준 차간티 감독의 능력에 다시 감탄할 수 있었고, 화면 속의 화면을 완전히 오버랩하고 중첩해서 드러내는 와중에 시공간의 이동을 묘사하는 시도를 엿보게 되었다. <웨이킹 라이프>에서도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꿈, 그리고 그 꿈의 연결을 관찰하는 객체임과 동시에 어느 때는 꿈에서도 대화의 주체가 되는 주인공을 바라보면서 여러 중첩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 두 영화는 모두 미디어가 얼마나 매개행위를 하는 동시에 얼마나 중첩적일 수밖에 없는지도 보여준다.
디지털 공간의 본래적 특성은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다는 것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한시라도 빨리 딸을 찾아내야 하는 아버지의 다급함은 그가 커서를 옮기면서 관객의 눈을 돌리게 하는 부분이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당황하여 클릭을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에서 일종의 ‘답답함’과 ‘서스펜스’를 느끼게 만든다. 모든 과정에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서프라이즈’를 이용할 수는 없지만, 더 강력한 ‘서스펜스’로 아버지의 정서 상태와 관객, 조력자인 줄 알았던 이의 계략이 반전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여러 증거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애프터 양>(After Yang, 2022)에서 드러나는 휴머노이드의 감정, 차는 팔지만 찻잎은 팔지 않고 중국의 차에 매료되어 중국인 딸까지 입양한 주인공의 ‘대체성’에 대한 갈망을 엿볼 수 있는 것과도 맞닿아있다.
대충 비슷한 것과 온전히 똑같은 것은 영원히 중첩될 수 없다. 그럼에도 디지털 공간에서 이들은 같은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여자와 여자를 진짜처럼 조작한 사진이나 사진 같은 그림은 모두 동일한 선상에서 우리의 눈을 속인다. 이는 영화가 전통적으로 우리의 눈에 저질러온 착시보다도 훨씬 고차원적으로 매개되며, 그렇다면 보이는 게 전부였던 인간에게 ‘더 이상 진짜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나?’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마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항상 본다는 것의 모순에 직면한다.
보려고 하면서도 보지 않고, 보지 않으려 해도 보는, 못 볼 것 같아서 눈을 피하지만 정작 더한 짓은 잘만 하는 등, 모순덩어리의 결집체인 인간이 얼마나 영화나 비-영화 등과 같은, 어떤 배타적인 특성들에 대한 각각의 규정과 개념화에 목말라 있으며, 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지를 한눈에 파악하게 해주는 것은 이러한 영화적 현실의 변화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진실에 배타적인 개념은 꼭 거짓이 아니다. 현실의 반대가 비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이라면, 진실에 상반된 곳에 위치하는 개념은 가상진실(?), 혹은 ‘보이게 만드는 것’, 즉 ‘미디어’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영화는 미디어라는 의미로 출발하여, 비-미디어, 탈-미디어를 거쳐 이제 재-미디어로 자신을 포지셔닝한다.
<웨이킹 라이프>를 통해 영화 이후의 영화, 즉 포스트 시네마가 어떻게 ‘디지털라이제이션’, 그리고 전통적 논의를 벗어난 양식을 부여받으면서 매개되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서치>로부터는 컴퓨터 스크린 속에서 기억의 가능성과 정보 조작의 여지로부터 그 틈새를 벌려내야하는 인간의 책임을 미스터리 추적극이라는 서사를 통해 재현하는 미디어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한편, 영화 <웨이킹 라이프>는 삶과 죽음, 꿈과 현실과 같은 차원의 추상적인 주제들을 맴돌고 있다면, 영화 <서치>는 너무나도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심각한 범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아버지의 여정이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가상현실이라는 키워드로 이 둘을 연결하여, 꿈이라는 비현실과 디지털 세계라는 비현실은 모두 가상적인 현실로서 기능하며 주인공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더 나아가 그것을 관람하는 관객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으로 그 의미를 좁혀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용과 형식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되면서 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지의 생각으로 또 다시 매개된다. 꿈을 관찰하는 나나 컴퓨터 스크린을 마주하는 나는 모두 ‘나’이다. 꿈에 참여하고, CCTV에 찍히는 나도 모두 ‘나’라는 귀결점을 가진다. 그렇게 점철된 의미로서의 인간은 다시 영화라는 양식으로 이러한 생각을 주고받고, 이제는 포스트 시네마 시대에서의 새로운 인류가 되듯이 의도된 필터 속에서 보고 듣고자 하는 주관의 개입을 조절할 수 있으면서도 그럴 수 없어서 다시 디지털 세계에 지배당하는 모순을 펼치며 살아간다.
영화를 보는 것을 넘어서서 생각하며 '읽는다'는 것은 영화 <웨이킹 라이프>와 <서치>에서 각각 다르게 표현된 가상현실을 경험적으로 맞닥뜨리는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과업이다. 내러티브의 안과 바깥 세계를 연결하는 차원의 미디어는 전통적인 영화에서도 가능한 숙제였다면, 이제는 우리가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나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간극, 그리고 영화와 영화가 아닌 양식들 사이의 구체적이지 못한 기준들에 대한 반문으로 이 과업의 질문은 확대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라즐로 네메스 감독, 영화 <사울의 아들>(Son of Saul, 2016).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웨이킹 라이프>(Waking Life, 2001).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6).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영화 <서치>(Searching, 2018).
코고나다 감독, 영화 <애프터 양>(After Yang, 2022).
Grabiner, E. (2015). The Holy Moment: Waking Life and Linklater's Sublime Dream Time. Film Quarterly, 68(3), 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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