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1)
살면서 사춘기를 겪었다라고 하는 기억이 있지는 않다.
그런데 사회에 진출하고 쳇바퀴 같은 삶 속에서 학창 시절이나 사춘기에 고민할 법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남들은 보통 사춘기 시절에 이런 고민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다소 늦게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만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찾지 못하고, 질문만 되뇌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쳇바퀴 같이 일상 생활에 스며들어 관성으로 일상을 지내고 있을때,
김영하 작가의 작품 <<작별 인사>>를 보고 나서 기억 속 저편에 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작별 인사>>의 간단한 스토리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주인공인 철이가 자신이 휴머노이드인 줄 모르고 사람인 줄 알고 지내다가 정부에 회수 명령으로 도망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에선 특정 사람의 의식을 클라우드나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장면이 나온다.
나의 기억을 옮기면 나는 옮긴 그곳에서 나로 존재 할 수 있을까?
육체는 단지 나의 기억을 쌓기 위한 도구이지 않을까? 그러니 이 경험과 기억이 나이지 않을까?
나는 우선 육체가 나 자신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영화 <<로보캅>>에서 보듯이 순직한 사람의 뇌 등을 이용하여 만든 사이보그도 나중에 자신을 기억을 찾으면서 다시 자아를 찾아가는 것처럼 기억이 나를 이루는 가장 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기억은 무엇일까?
이번엔 영화 <<메멘토>>를 봐보자.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가진 주인공이 기억을 잊지 않고 복수하기 위해 몸에 문신 및 사진을 남겨 기억을 남긴다.
하지만 그 문신과 사진이 조작되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나의 기억이 조작된다면 이것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조작된 기억이 나라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기억도 나의 존재를 이루는 가장 큰 부분이라는 것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질문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내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어떤 형태에 대해 나를 투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나라는 자체에 사로잡혀 질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 일 수 있다.
불교에서는 나와 세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무상과 무아의 세계
무상이란 그 어떤 것에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고
무아는 그 어떤 것에도 단독적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변하지 않고 고유한 단독 실체라는 것에 사로잡혀 나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무상과 무아의 세계에선 그저 인연에 따라 내가 생겨나고 사라질 뿐이다.
즉,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딸이면서 누군가의 형제자매 그리고 누군가의 친구이다.
오직 나 혼자만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세상에서 나는 나를 어떻게 인식 할 수 있을까?
상호작용할 대상이 없는 그런 세상에선,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결국 타인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