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수호천사를 보내주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집을 판 돈은 그리 오래 버텨주지 못했다. 삼촌들은 아직 학생이었고, 할아버지의 사업마저 휘청거리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엔 돈이 메마르기 시작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집안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가난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 못한 채 속으로만 앓는 사이, 우리 남매는 유치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아침이면 동네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가방을 메고 유치원 버스에 올랐다. 아이들이 떠난 적막한 골목에서 나와 동생이 찾아가는 곳은 늘 정해져 있었다.
동네 공터의 구석 자리
그곳에서 내가 소꿉놀이 대장이 되었다. 굴러다니던 빨간 벽돌을 돌로 갈아 고춧가루를 만들고, 지천에 널린 노란 민들레를 뜯어 버무렸다. 나는 엄마이고 동생은 아빠였다.
“ 여보 이거 제가 만든 김치예요. 드셔보세요.”
내성적이고 착하기만 했던 내 동생은 내가 건네는 가짜‘빨간 벽돌 김치’를 진짜로 먹어야 했다.
다른 아이들이 노래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우리 둘만 그 공터에 덩그러니 남겨져 엄마아빠 놀이하며 다른 아이들이 오기만 기다렸다.
오가며 그 모습을 지켜본 인근의 유치원 원장님은 우리 남매를 유치원에 다니게 해 주셨다. 아빠가 하늘에서 보낸 또 다른 수호천사 같았다. 무상으로 다니게 해 주셨지만, 어린 나는 모두가 정당한 대가를 내고 다니는 줄 알았을 만큼 그 어떤 차별도 느끼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내 딸아이의 유치원 졸업 소식을 듣다 보니, 그 시절 나의 졸업 사진 촬영 날이 떠올랐다. 사진은 찍었지만, 돈을 내야만 찾을 수 있었기에 우리 집 형편으로는 찾을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원장님이 직접 액자를 들고 우리 집 문을 두드리셨다.
“할머니, 미뇽이 사진이 이렇게나 예쁜데 왜 안 찾아가세요. 돈은 나중에 주셔도 되고, 정 없으시면 안 주셔도 됩니다.”
원장님의 간곡한 호의에도 할머니는 서슬 퍼런 기세로 거절하셨다. "안 받겠다"며 문전박대하는 할머니와
‘처음 졸업하는데 유치원 졸업 사진은 있어야 한다’며 실랑이를 벌이던 원장님은 결국 액자를 문 앞에 두고 도망치듯 떠나셨다.
할머니는 문밖에 놓인 사진을 쳐다도 보지 않으셨다. 어린 마음에 서운함이 몰려왔지만, 나는 몰래 그 사진을 집어 들어 안방 장롱 깊숙한 옆면 틈새에 숨겨두었다.
한참 시간이 흘러 초등학생이 된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그 원장님을 만났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인사를 건넸다.
“원장님! 그때 졸업 사진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사진값 꼭 드릴게요!”
어린아이의 당돌함에 원장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셨다.
“아니야, 미뇽아! 안 줘도 돼. 그거 할머니가 벌써 돈 다 내셨어. 너 몰랐구나?”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원장님이 미안해하지 말라는 배려 섞인 인사인지 알았다.
그런데 내가 시집가서 한참 후에 할머니방에 들어갔을 때, 나는 보았다. 장롱 옆 어둠 속에 처박혀 있던 내 졸업 사진이 당당하게 티브이 옆에 세워져 있었다.
“할머니... 이거 쳐다도 안 보더니 언제 꺼냈어? 그리고 원장님이 그러는데 할머니가 사진값 다 줬다며? 그때 엄청 가난했다며, 무슨 돈으로 줬어?”
할머니는 돋보기 너머로 사진 속 나를 보며 무심히 대답하셨다.
“난 이 사진이 제일 예뻐.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내 새끼 이렇게 이쁜 줄도 모르고 지나갔네... 무슨 돈? 몰라도 돼. 그냥 줬어!”
나중에야 늦둥이 막내 삼촌을 통해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 꼿꼿한 자존심을 꺾고 남의 집 파출부 일을 나가 그 사진값을 마련하셨다고 했다.
“그래야 너희 인생이 잘될 것 같았대. 남한테 거저 얻어먹고 시작하는 인생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셨던 거지.”
삼촌의 그 말에 나는 목이 메었다.
할머니에게 그 액자는 단순한 사진이 아니었다. 가난이라는 파도 속에서도 내 새끼의 자부심만큼은 온전한 '당신의 힘'으로 지켜내겠다는 고집의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