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천미리 우유

우유를 사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by 미뇽작가

할머니는 매주 우리를 목욕탕에 데려가셨다. 고만고만한 연년생 남매를 여탕에 몰아넣고, 기진맥진할 때까지 우리 몸의 때를 야무지게 밀어내셨다.


목욕을 마친 후 젖은 머리를 말리며 마시는 음료수는 정말 꿀맛이었는데 보통은 작은 요구르트나 작은 우유를 사주셨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옆집 세미가 보란 듯이 1000ml짜리 거대한 흰 우유 팩을 혼자 마시고 있었다.


세미는 으스대는 표정으로 그 큰 우유에 빨래를 꽂고 혼자서 쪽쪽 빨아먹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 모습이 어찌나 얄밉고도 부러운지, 차마 사달라는 말도 못 하고 침만 꼴깍 삼키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눈치가 없던 네 살배기 남동생은 달랐다.


“할머니! 나도 저거! 나도 저 큰 우유 사줘!”


할머니는 단호하게 안 된다며 작은 우유를 내미셨지만, 동생은 그날따라 웬일인지 고집을 꺾지 않았고 급기야 목욕탕 바닥에 드러누워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달래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때였다. 할머니가 동생의 팔을 확 잡아 일으키시더니 매서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놈 새끼! 너는 그냥 목욕탕에서 살아라. 우린 집에 간다!”


참다못한 할머니가 차갑게 등을 돌리셨지만, 고집이 오를 대로 오른 동생은 멈추지 않았다. 녀석은 목욕탕 골목 입구까지 쫓아오며 길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울음소리는 골목 전체를 울렸고,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인 채 할머니 옷자락만 붙잡고 있었다.


그때였다. 골목 저편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바로 할아버지였다. 평소 호랑이처럼 무섭고 엄격하던 할아버지의 등장에, 방금까지 악을 쓰며 울어대던 동생은 마법에 걸린 듯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버렸다.


“여보! 이 녀석 좀 혼 좀 내세요. 세상에 그 비싼 우유 제일 큰걸 혼자 먹겠다고 길바닥에서 저 난리를 부리잖아요!”


할머니는 속상함과 괘씸함이 섞인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하소연을 쏟아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누워있는 동생을 내려다보셨는데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지만 할아버지는 뜻밖에도 녀석을 덥석 번쩍 안아 올리셨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말은 듣지도 않으신 채, 발길을 돌려 다시 목욕탕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셨다. 그것도 여자들이 갈 수 없는 금남의 구역, 남탕으로 말이다. 할머니와 나는 길바닥에 서서 어리둥절한 채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다 한참을 기다려도 기별이 없자, 우리는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동생의 손에는 예상했던 1000ml 우유 팩은 없었다. 다 먹고 왔나 싶어서


“할아버지가 우유 사줬어?”


하고 물어보았지만 동생은 “아니...”라고 짧게 답하고는 조용히 밥만 먹었다. 목욕탕 안으로 끌려가 할아버지한테 혼났나 싶어서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루 종일 그림자처럼 나만 졸졸 따라다니던, 친구 하나 없던 그 내성적인 녀석이 저녁 6시만 되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었다.


“미뇽아! 네 동생 어디 갔냐? 밥 먹게 찾아와라!”


할머니의 명령에 동네를 샅샅이 뒤지던 나는 동네 슈퍼 앞 길목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할머니가 밥 먹으래!”


동생은 마치 도둑질이라도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그 순간, 골목 저편에서 퇴근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동생이 전력 질주로 달려가 할아버지의 서류가방을 덥석 받아 드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인사하는 동생의 모습은 깍듯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했다. 무뚝뚝하기만 하던 할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더니,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동전 몇 개를 꺼내 쥐여주셨다.


“오냐, 기특한 녀석. 누나랑 나눠 가져라.”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동생 사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웠던 거지? 혹시 할아버지가 동생만 매일 돈 준거 아니야? 이 자식 그동안 얼마를 빼돌린 거야? 그리고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다정하지?‘ 이런 질투와 의심에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하셨다.


“이제 미뇽이도 할아버지 마중 나오는 거야? 할아버지 너무 기분 좋다! 내 새끼들이 최고다 최고! ”


그날 이후, 우리 남매는 해지는 저녁이면 슈퍼 앞 길목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공평하게 우리 둘의 손에 동전을 쥐여주셨고, 우리는 그 돈으로 쭈쭈바를 입에 문 채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했다. 이건 할머니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기로 한, 우리 셋만의 끈끈한 '비밀 결사'였다.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느 날, 나는 동생에게 다시 한번 그날의 진실을 물었다.


"석아, 진짜 솔직히 말해봐. 그날 남탕에서 할아버지가 너만 큰 우유 사줬지? , 안 사줬어?"


동생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사줬어. 진짜로."


"진짜? 그런데 어떻게 풀린 거야?”


"안 사줬어.. 계속 우니까 목마를 태워줬어. 진짜 우리 아빠 같았어. 난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래서 매일 여기서 기다리는 거야."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애초에 그 큰 우유를 사주려고 남탕으로 들어가신 거였지만 그 큰 우유는 여탕에서만 파는 전신마사지용이었던 거였다. 실망한 석이를 달래기 위해 할아버지는 목마를 태워주신 거였는데 석이는 그 순간 아빠가 언 듯 생각이 난 거 같다.


아빠가 아프기 전 석이를 항상 목마를 태우고 다녔다고 하는데 아빠 얼굴은 기억이 안나도 그 따뜻했던 어깨는 기억했다.


악에 받쳐 우는 석이의 눈물을 멈출 수 있었던 건 천미리 우유가 아니라 아빠의 품 같은 할아버지의 목마였다. 그 목마에서 어린 석이의 한이 사르르 풀렸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석이에게, 이제는 백발이 된 할머니가 쏟아낸 푸념에 우유를 사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게 되었다.


"야 이 새끼야! 밥을 그렇게 깨작깨작 먹냐? 너는 어려서부터 진짜 말을 더럽게 안 들었어. 너 기억나냐? 목욕탕에서 그 큰 우유 사달라고 길바닥에서 떼 부리던 거! 야, 너 그거 알아? 그날 네 할아버지가 나한테 애 기를 왜 죽이냐고 얼마나 뭐라 하던지! 내가 너 그날 밥 먹고 저녁에 몰래 데리고 나가서 그 큰 우유 사줬냐, 안 사줬냐? 이 싹수없는 새끼야, 사줬는데 처먹지도 않고!"


할머니의 거친 욕설 섞인 타박 속에서 사랑이 묻어났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너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다 했는데, 넌 할미를 개콩으로 알고 말이야! 할아버지만 따르고... 이 자식이 쳐 돌았나, 그냥 먹어 무슨 갈비야 이 새끼야!

내일 갈비 해놓을 테니 일찍 오고... 차 조심해, 이 자식아!"


그 비싼 우유를 석이만 사준 사람은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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