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회장 1

by 미뇽작가


"나는 우리 애들 없이는 못 살아. 애들 없으면 나도 죽어버릴 거야."


스물일곱. 결혼한 지 불과 6년도 되지 않아 남편을 떠나보낸 나의 엄마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다. 이제 내 아들이 딱 그때의 엄마 나이인 스물일곱이 되었는데 내 눈에 아들은 그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다.

엄마는 상상이 되지 않는 세상이 무너지는 상실을 홀로 견디고 있었다.


그 시절, 할머니에게 그런 딸은 얼마나 큰 아픔이자 애처로운 가시였을까.


서너 살 남짓한 어린 남매를 두고 눈을 감던 사위는 장모인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제발 이 사람, 좋은 곳으로 시집 다시 보내달라고. 하지만 고집스러운 딸은 도무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틈만 나면 좋은 선자리에 딸을 밀어 넣었다. 상대는 대개 아이가 있는 홀아비였고 조건은 늘 비슷했지만 “애들은 두고 몸만 오라"는 것. 그 한마디에 선자리는 늘 난장판이 되어 무산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따라다니는 남자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꽤 많았다고 했다.


"맞아, 그땐 남자들이 왜 이리 따라다니는지 정말! 빨리 늙게 해 달라는 게 내 기도였어. “


과거를 회상하는 엄마의 눈가가 가늘게 휘어졌다.


"같은 교회 다니던 청년회장 기억나니?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좋았는데, 명문대 출신에 대기업 취업을 앞둔 앞날 창창한 총각이었어. 우리 엄마, 그러니까 네 외할머니는 그 사람이랑 잘해보라고 성화였지. 그런데 난 그 사람이 당최 마음에 안 들더라고."


"진짜? 나도 기억나! 그 '엄친아' 청년회장 아저씨? 엄마랑 그 아저씨 사이에 썸이 있었던 거야? 세상에, 궁금해 죽겠어. 더 이야기해 줘 봐."


그러자 “ 딸한테 별이야기를 다한다”며 엄마는 웃으셨다.


"그런데 엄마, 그 엄친아 청년회장 아저씨랑은 왜 잘 안 됐어? 나도 기억나거든. 나랑 내 동생한테 진짜 잘해줬잖아. 우리 보고 아빠라고 부르라면서 선물도 사주고... 우리도 그 아저씨 꽤 좋아했었단 말이야. 혹시 그 사람도 결혼할 때 되니까 애들은 두고 오라고 했어?"


"아니... 그때 내가 학교 다닐 때였는데, 그 사람은 매일같이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렸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정말 지극정성이었지. 나를 참 많이 좋아해 줬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이 설레지가 않더라."


"뭐? 설레지가 않았다고? 엄마, 그때 상황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였어? 그냥 만났어야지!"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이는 나를 보며 엄마는 그저 "허허" 하고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말이다. 그 사람 어머니도 나를 참 예뻐해 주셨거든. 그 남자는 총각이었는데도, 애들 다 데리고 들어와서 같이 살자고 했어. 서대문에 아파트까지 얻어줄 테니 몸만 오라고, 그렇게까지 말했었지."


"아우, 답답해 정말! 당연히 결혼했어야지! 그런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내가 답답해하며 가슴을 두드리며 안타까워하자, 엄마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나보고 빨리 시집가라고 등 떠밀던 우리 엄마... 네 할머니가 정작 그 결혼을 반대하시더라고."


"아니, 왜? 할머니가? 그 좋은 조건을 두고 할머니가 반대를 하셨다고?"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생 딸의 재혼이 소원이라던 할머니가 왜 그런 완벽한 기회를 발로 차버리신 걸까.


"응... 결정적 사건 때문에 우리 엄마가 반대해서 결국 깨지긴 했는데…

이상하게 난 그 남자가 설레지 않았어. 손을 잡아봐도 아무런 느낌이 안 나는 거야. 그래도 워낙 잘해주니까 그게 위로가 돼서 만나긴 했지. 그런데 말이다, 만날 때마다 네 아빠 생각이 나서 미치겠더라고."


엄마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매 순간 죽은 남편이랑 비교가 되니까 도저히 진도를 못 나가겠는 거야. 내가 스킨십이니 키스니 피하고 자꾸 거리를 두니까, 그 사람은 그럴수록 애가 달아서 나한테 더 매달리더구나."


그 집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같은 교회를 다니며 워낙 각별한 사이였다. 그쪽 집안에선 엄마를 예뻐하며 애들도 데려오라, 아퍄트도 얻어주마 약속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이제야 딸의 팔자가 피나 싶어 결혼 날짜를 잡네 마네 하며 들떠 계셨다.


그 남자가 대기업 입사를 앞두고 있던 어느 수요일 저녁 예배 시간이었다.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이 남자가 자꾸 내 손을 잡으려 하더라고. 내가 몇 번을 뿌리쳤지. 그랬더니 이번엔 내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고 들추는 거야. 예배 중이라 소리를 낼 수도 없고, 내가 조용히 왜 이러냐고, 하지 말라고 밀어냈어."


"세상에, 예배당에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내 물음에 엄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날의 수치심이 다시 살아난 듯했다.


"내가 계속 거부하니까, 그 준수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라. 그러더니 내 귀에 대고 아주 낮게 읊조렸어. ‘씨발, 처녀도 아닌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