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피우는 남자들 1

친구아빠 1

by 미뇽작가

세상은 젊은 과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특히 남자들이 그랬다.

할머니 집을 나와 엄마와 우리 남매가 독립하면서 나는 비로소 쓰디쓴 진실 하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남자 열 명 중 일곱 여덟은 기회가 되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정조를 지키는 고결한 이들도 있겠지만, 당시 내 눈에 비친 세상은 그들이 도리어 숭고해 보일 정도로 부정한 욕망이 들끓는 곳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남자들이 우리 집 문턱이 닳도록 찾아왔으니까. 엄마는 나를 딸이 아닌 친구처럼 대하며 모든 일을 가감 없이 털어놓곤 했다.


"아, 진짜 빨리 늙어버리고 싶다. 남자들이 너무 귀찮게 굴어서 숨 쉴 수가 없어."


이것은 엄마의 입버릇이자 넋두리였다. 엄마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남자들은 미혼과 기혼을 가리지 않았고, 그 면면 또한 기가 막힐 정도로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내 기억 속에 각인된 '최악의 세 남자(No.3)'를 꼽아볼까 한다. 그중 압권은 단연 '친구 아빠'가 밤늦게 우리 집을 찾아왔던 사건이다. 평생 비밀로 간직해 온,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그 막장 드라마의 서막은 이랬다.


유진이는 나의 교회 친구였다. 유진이 어머니 또한 신앙심이 깊어 교회 일에 헌신적이었고, 그 덕에 아이들뿐만 아니라 엄마들끼리도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유진이 아빠는 회사가 멀어서 출퇴근이 힘들어 회사 근처 고시원에서 지낸다고 했다.

남편의 빈자리가 컸던 우리 엄마와, 남편이 있어도 늘 혼자였던 유진이 엄마는 금세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 유진이 엄마는 우리 엄마를 마치 남편처럼 의지하는 듯했다.


두 집의 교류는 뜨거웠다. 하루는 우리 집에서, 다음 날은 유진이네 집에서 밤이 쇠도록 수다 꽃이 피었다. 유진이 엄마가 갓 지어낸 따뜻한 집밥의 온기는 아빠 없는 우리 집의 쓸쓸함을 잊게 할 만큼 다정하고 맛있었다.


하지만 엄마들의 우정과 달리, 아이들의 세계는 평온하지 않았다. 나는 유진이보다 유진이 언니와 더 마음이 잘 맞았고, 유진이는 그런 나를 지독하게 질투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다. 애들이 으르렁대며 싸우면 엄마들의 만남도 소원해질까 봐, 두 분은 우리를 화해시키려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


사건의 발단이 된 그해 크리스마스 파티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서로의 엄마가 몰래 선물을 준비해 유진이네 집에서 다 함께 파티를 열기로 한 것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유진이 아빠를 대면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거와 달리 소탈함과 거리가 먼, 아주 지적이고 수려한 미남이었다. 솔직히 말해 미인축에 들지 못하는 유진이 엄마에 비해, 아빠의 외모는 지나치게 출중해서 내가 봐도 둘은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가 그 집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유진이 아빠는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거실에 앉아 계셨다. 그런데 파티를 시작하기 위해 모두가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잠시 방에 들어가서 돌연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집안에서 열리는 소박한 저녁 식사 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세미 정장 차림이었다.

정돈된 머리와 날 선 셔츠 깃, 그리고 묘하게 상기된 눈빛. 그 과한 정중함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유진이는 아빠가 잘생겨서 참 좋겠다.’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지만, 여자들만의 안식처 같던 우리 모임에 낯선 성인 남자가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분위기는 이내 어색하게 굳어버렸다. 그런 공기를 읽지 못한 것인지, 유진이 엄마는 들뜬 목소리로 남편에게 우리 엄마를 소개했다.


“여보, 인사해. 여긴 내 절친 영이 씨야.”


그 순간이었다. 소개를 받는 유진이 아빠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마치 설레는 소개팅 자리에 나온 풋풋한 대학생처럼,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기묘한 수줍음을 지켜보며 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식사 내내 유진이 아빠는 과묵했지만 집요했다.

조용히 미소 지으며 엄마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가도, 시선은 자꾸만 우리 쪽을 향했다. 내가 멀리 있는 갈비찜을 집으려 팔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 접시를 끌어다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 과한 친절을 본 유진이가 질투 어린 시선으로 나를 째려보자, 그는 오히려 유진이를 매섭게 꾸짖었다.

“눈 똑바로 안 떠? 어디서 그런 버릇을 배웠어!”


처음 만난 우리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정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딸에게는 서슬 퍼런 꾸중을 내뱉는 모습이 너무나 이중적이라 기괴했다.


기묘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지나고 며칠 뒤였다. 밤늦은 시간 우리 집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인터폰 화면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아빠였다.


“엄마! 유진이 아빠가 이 시간에 우리 집에 왜 온 거야?”


당황한 나의 물음에 엄마는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뱉으셨다. 당시 우리가 살던 곳은 엄마가 다니던 회사의 2층 사택이었는데, 현관에서 벨을 눌렀는데 안 받으면 다른 집이 받아야 벨이 꺼졌다. 문을 열어주지 않고 버티다간 다른 집에서 누구냐고 묻게 될까 봐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자 유진이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