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농구선수 그 후

by 미뇽작가

지금은 그분과 연락이 닿지 않지만, 한동안은 소식을 주고받으며 지냈던 적이 있다. 워낙 유명한 분이었기에 엄마는 그분이 근무하는 곳으로 무작정 편지를 보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분은 봉투 위에 적힌 '영이'라는 이름 두 글자만 보고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가슴 한구석에 평생 묻어두었던 바로 그 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니? 20살에 우리 늘 함께였는데 시간이 참 많이 흘렸네. 괜찮다면 한 번 보고 싶다.‘


연락처와 함께 남긴 짧은 진심을 눌러 담았고 며칠 후 연락이 왔다. 둘 다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

십오 년 전쯤, 두 사람 모두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눈치 없이 유명스타가 궁금했던 우리 남매, 그리고 할머니까지 다 함께 강남의 한 일식집에서 그분을 만났다.


식사 자리는 정갈했고 분위기는 따뜻했다. 종업원이 유명인이 된 그분을 보고 참지 못하고 사인을 해달라고 하자 멋지게 사인을 하시더니 할머니를 바라보며 “어머니 그땐 참 미인이셨는데.. 지금도 고우시지만 어머니를 뵈니 세월이 실감이 되네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용서하게나. 나 때문에 그 예쁜 청춘들이 꽃도 펴보지 못하고 헤어져서... 딸이나 자네나 둘 다 고생시키게 만든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무거웠네. 부디 나를 용서하게." 할머니의 떨리는 사과를 전했다.


그러자 그분은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어르신. 차라리 그때 잘 헤어진 겁니다. 사실... 결혼한 제 아내가 저희 어머니 시집살이 때문에 고생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 부부 결혼 생활도 무척 힘들었어요. 아마 영이가 왔더라면 성격상 더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그분이 잠시 엄마의 곁에 멈춰 섰다. 그리고 수십 년 전 버스 안에서 엄마를 훔쳐보던 그 소년의 눈빛으로, 이제는 노년이 된 엄마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영아... 내 인생에서 1번은 언제나 너였어."


그분은 담담하지만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나의 첫사랑 영이야. 나는 널 잊은 적이 없어. 우리가 그때 인연이 닿지 못해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너나 나나 우리 인생 참 열심히, 그리고 잘 살았다. 비록 곁에 있지는 못했어도 내 마음속의 1번은 여전히 너야. “


그 말에 영이는 빙긋 웃었다.

“고마워. J 야 나는 너의 1 호팬인 거 기억하지?

나도 널 항상 응원해 왔어! ”

그분도 안도하며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지금 네 모습이 참 행복해 보여서 보기 좋다. 영아, 앞으로도 항상 행복해라."


그분은 끝내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돌아섰다. 엄마는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슬퍼서가 아니라, 비로소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뜨거운 첫사랑을 웃으며 보내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영이도, 쉰이 넘은 엄마도, 그날 그 일식집 문을 나서며 비로소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노년에 다시 만난 엄마와 그분은 그 후로도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지셨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어린 남매를 키우며 모진 세월을 견뎠다는 엄마의 고백에, 그분은 자기 일인 양 가슴 아파하셨다.


"너희 엄마와 그때 결혼했다면, 아마 너희는 내 아이들로 태어났을 거다. 그러니 나를 아버지라 생각하렴."

그분은 우리 남매에게도 따뜻한 어른이 되어주셨다.

특히 내 남동생은 그분을 유독 따랐다. 전설적인 스포츠 스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겠지만, 엄마를 향한 그분의 일편단심이 동생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가끔 동생과 단둘이 만나 술잔을 기울일 때면, 동생은 짓궂게 묻곤 했다고 한다.

"아저씨, 진짜 우리 엄마가 1번이에요? 아직도요?"

그분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응, 나는 영이가 무조건 1번이다."

"그럼 우리나라 최고 선수인 그 사람이랑 우리 엄마 중에 골라야 한다면요?"

"누가 와도 영이가 1번이야. 섭섭해도 어쩔 수 없다!"

유머와 재치가 있으셨던 그분은 동생까지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렇게 돈독했던 만남은 어느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멈췄다. 두 분은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하셨는데 엄마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현재의 내가 아니라, 스무 살 솜털 보송보송하던 시절의 영이를 간직하고 싶어 하더구나.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어. 내 기억 속의 J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시절의 소년이어야 하니까."


그분이 엄마를 바라보며 "너 그때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나 있었는데..."라고 말하던 순간, 엄마는 직감하셨다고 했다. 서로가 사랑하고 있는 건 지금 눈앞의 노인이 아니라, 가슴속에 박제된 눈부신 청춘이라는 것을.


그 추억을 지키기 위해 두 분은 가장 아름다운 지점에서 서로의 손을 놓아주었다. 엄마의 첫사랑은 그렇게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