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가 합숙 훈련을 위해 집을 비운 사이, J의 어머니는 영이를 자신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불러들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아들이 없는 동안 영이가 혹여 다른 마음을 품거나 다른 남자를 만날까 봐 불안해하는 아들을 대신해 영이를 곁에 묶어두려는 속셈이었다.
결국 영이는 멀쩡히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레스토랑 카운터에 앉게 되었다. J의 어머니에게 그것은 바쁜 가게 일도 돕게 하고 영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카운터에 앉아 일을 보고 있었지. 그런데 네 외할머니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셨단다."
딸이 일하는 곳이 대체 어떤 곳인지, 끼니는 제때 챙기는지 걱정된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오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하필 그 타이밍에 술에 잔뜩 취한 손님 하나가 계산서를 붙들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거 바가지 아니야? 내가 먹은 건 얼마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손님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며 소란을 피웠다. 영이엄마는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커피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광경을 지켜보셨다. 딸이 낯선 이에게 험한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턱 막히는 거 같았다.
영이엄마는 식어버린 커피잔을 내려놓고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J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떼셨다.
"아무리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라지만, 술 취한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며 험한 말을 내뱉는 곳이네요. 저는 제 귀한 딸을 이런 곳에서 일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이를 데려가겠습니다."
그 말에 J의 어머니도 지지 않고 날을 세웠다.
"험한 곳이라뇨! 누가 들으면 제가 애한테 술집 접대라도 시킨 줄 알겠네요!"
"J도 아나요? 이곳에 이런 술주정뱅이들이 드나드는걸? 아는데도 여기서 일을 하게 내버려 둔 건가요?"
J의 어머니는 기가 막힌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시집오면 어차피 이 레스토랑 물려받아서 영이가 다 관리해야 할 텐데, 제가 뭐 못 할 일이라도 시켰나요? J가 영이 좀 잘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하길래 저도 바쁜 와중에 가까이 두고 챙기려고 부른 겁니다!
자꾸 오해하시니 저도 기분이 참 안 좋네요!"
"뭐라고요...?"
영이엄마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물려받아 관리한다'는 말이 할머니에게는 귀한 딸을 일찌감치 식당 안주인으로 주저앉혀서 부려먹으려는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엄마들끼리 나를 가운데 두고 고성이 오갔어. 결국 참다못해 폭발한 할머니가 내 손목을 홱 잡아끄셨지."
"야, 이 바보 멍청이야! 너는 시집도 가기 전부터 벌써 시집살이를 하고 자빠졌냐!"
영이 엄마는 그대로 영이를 레스토랑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렇게 폭풍 같은 싸움이 휩쓸고 지나갔는데, 무슨 염치로 J를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영이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집에 돌아오니 영이아빠는 더 완강하게 말했다.
"절대 안 된다! 시작부터 딸자식 부려 먹을 생각만 하는 집구석에 시집가면 평생 고생길 훤해!"
결국 어른들의 불같은 반대에 밀려, 뜨거웠던 그들의 계절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하... 그러고 나서 바로 아빠를 만난 거야?"
"응. 그 후 네 아빠를 만났는데, 그때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고 집안이 온통 난리였지. 또 헤어지라고 할까 봐 이번엔 아예 영화 한 편을 찍었어. 무작정 도망가서 너를 임신했거든. 그러고 나서야 겨우 허락받고 살았지 뭐니."
"아이고... 그런데 아빠가 너무 빨리 돌아가셨네."
내 말에 엄마는 잠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네 아빠 죽고 나서 우연히 TV를 켰는데, 글쎄 그 남자가 농구 대회에서 우승하고 유명 스타가 되어서 화면 가득 나오고 있더라고. 매일같이 TV에 나오는 그 얼굴을 보며 할머니는 땅을 치고 후회하셨지."
"아이고, 내가 그때 조금만 참을걸! 그냥 J랑 결혼하게 내버려 둘걸! 내가 내 자식 팔자를 망쳤네, 망쳤어!"
할머니의 탄식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엄마... 엄마도 솔직히 후회해? 그때 그 사람 선택하지 않은 거?
내 질문에 엄마는 단호하게,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니.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나는 이 결말을 다 알고 다시 돌아가도 너희 아빠야. 아빠를 만나 너희를 낳고 살았던 그때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순간이었어."
엄마가 농구선수 이야기를 처음 해주었을 때가 아마 내가 고등학생 때였던 거 같다. 그때는 사실 반은 믿고 반은 대충 흘려 들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우리 가족은 과거 스타농구선수 이셨던 그분을 만나게 되었고 이 모든 것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