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엄마? 그날 나갔어? 진짜로?"
"난 사실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어. 혹시라도 나 때문에 그 애가 대학에 떨어졌을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마침내 그날이 왔지. 난생처음 해보는 화장에 제일 예쁜 옷까지 챙겨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명동성당 앞에 섰단다."
수많은 인파가 쏟아져 나오는 명동의 성탄 전야. 영이는 그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농구선수 J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 애가 나타나지 않는 거야. 약속한 7시가 지나고, 8시, 9시... 당시엔 핸드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지. 한참을 서성이다 '아, 이제는 정말 가야겠다' 하고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다급하게 불렀어."
"저기요! 혹시... 영이 씨 맞아요?. “
고개를 돌려 마주한 남자는... J 가 아니었다.
"영이 씨 맞으시죠? 저, J 친구예요. 아 미안합니다.
차가 너무 밀려서 헉헉 ….. 늦었어요!. J가 부탁해서 대신 왔어요. “
내 앞에 나타난 남자는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전했다. J는 명문 Y대 농구부에 스카우트되었고, 하필이면 약속 날을 앞두고 엄격한 합숙 훈련에 들어가는 바람에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남자가 내민 종이봉투 안에는 편지와 선물이 가득했다.
"봉투 안을 보니까 한두 통이 아니더라..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매일매일 일기를 쓰듯 적었나 봐. 마지막 편지에는 '3개월 동안 합숙 훈련 잘 마치고, 꽃 피는 3월에 꼭 다시 만나자'라고 적혀 있었어."
"세상에, 진짜 로맨틱하다...
그래서, 봄에 다시 만났어?"
"응.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 우린 다시 만났어.
그 애의 대학 캠퍼스에서 내내 붙어 다녔어. 시합이 있는 날엔 내가 1호 팬을 자처하며 응원을 갔고, 훈련이 없는 날엔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명동이며 종로며 같이 쏘다녔지. 정말... 꿈처럼 달콤한 시간이었어."
나이는 어렸지만 둘의 사이는 점점 뜨겁고 깊어졌다.
대학 캠퍼스 잔디에 J가 영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말했다.
“너무 행복하다. 너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도 이렇게 살고 싶어.”
영이의 세상도 온통 J로 가득했다.
둘은 하루 종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주로 기다리는 쪽은 영이었지만 둘은 헤어지는 게 아쉬워 버스도 타지 않고 걸어 다녔다.
J는 알면 알수록 지적이고 매력 있는 남자였다. 농구선수라면 훈련에 바빠 학업이나 독서를 멀리 할 법도 하지만 그는 영이와 서점에서 같이 책을 읽으며 데이트했다. 그가 준 책들로 책장이 가득 채워졌다.
딸에게 말하는 영이의 눈빛이 아스라한 그리움으로 젖어들었다. 하지만 그 행복한 기억 뒤에는 늘 '왜'라는 의문이 남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 좋았는데 왜 헤어졌어?"
"그때.. 우리 집 형편이 갑자기 안 좋아졌어.
대학에 합격하고도 결국 등록금을 못 내서 포기해야 했지. 고교 졸업하고 얼마 후에 작은 사무실에 취직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J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오셨더라고."
"뭐야? 드라마처럼 흰 봉투 내밀면서 우리 아들 앞길 막지 말고 헤어지라고 하셔?"
딸의 엉뚱한 질문에 영이는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하하하! 정반대였지. J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귀한 외아들이었거든. 그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시더니… 네가 영이로구나.. 어쩜 이렇게 천사처럼 고울까? 하시는 거야. 나를 엄청 예뻐하셨어. “
J는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는데 J 어머니는 서울에서 큰 레스토랑을 하는 자수성가 사업가였다.
J 어머니: J 가 너랑 결혼시켜 달라고 난리야. 도대체 어떤 아가씨이길래 어린 녀석이 그 난리인가 싶어서 내가 이렇게 불쑥 찾아왔어. 미안해.. 그런데 보니까 우리 아들 마음 알 거 같아. 너무 예뻐서 불안할만하다
서로 마음만 확고하다면 빨리 결혼하는 게 좋겠어.
마음이 안정되어야 농구도 잘하는 거 아니겠니?
J엄마는 사업가답게 추진력도 대단했다. J 엄마의 주도로 이제 갓 20살을 넘긴 어린 커플이 상견례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이의 부모는 달랐다. 하나뿐인 고명딸에 애지중지 키운 첫아이가 아니던가. 할 수 만 있다면 늦게 늦게 시집보내고 싶은 것이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이었다.
영이아버지: 일단 약혼만 하고 결혼은 각자 어느 정도 직장에 자리도 잡고 한 다음에 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나 J는 너무 불안해 미칠 거 같았다.
합숙이나 시합을 하면 연락자체가 안 되니까 영이가 다른 사람을 만날까 봐 온갖 상상이 되었다. 얼마 전엔 영이가 취직을 했는데 남자 직장선배가 차로 데려다준다는 이야기는 들으니 도저히 운동에 집중이 안되고 그냥 말로 슬럼프였다. 감독님과 동료들 볼 면목이 서지 않아 괴로웠다.
J : 너 혼자 두는 거 너무 불안해서 집중이 안 돼.
우리 집에 엄마 혼자 계시니까 내 방에서 지낼래?
집이 거의 비어 있어서 너한테도 좋을 거 같아.
너희 집 식구들 많아서 네 방도 없다며…
제발 우리 집에 가 있어라 응??
영이 : 하지만.. 우리 엄마가 허락 안 하실 거야
지금도 8시 전엔 집에 들어오라 난리이신걸?
J와 J 엄마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영이 부모는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뜨겁고 단단해 평생 갈 거 같았던 둘의 사랑은 어떤 사건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결정적 사건으로 두 사람은 어이없게 헤어지게 되는데..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