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예의 2위 - 2
텅 빈 옥상,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자 죽은 남편의 얼굴이 일렁였다.
‘차라리 뛰어내리면 이 지옥 같은 고통이 끝날까.’
난간 아래로 내려다본 교회의 정원은 기묘하리만치 평온했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뭇잎들이 마치 폭신한 침대처럼 보여, 그 위로 몸을 던지면 영원한 안식에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영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떨리는 다리를 난간 위로 올렸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그 찰나, 정적을 깨고 어디선가 가느다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이었을까. 하지만 그 울음소리는 친정집에 맡겨두고 온 어린 남매의 목소리가 되어 영이의 심장을 거세게 내리쳤다.
“엄마…… 엄마아…….”
딸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영이를 잡아끈 것은 신의 구원이 아닌, ‘엄마’라는 이름의 본능이었다.
‘그래, 나는 엄마였지. 내가 없으면 불쌍한 내 새끼들은 어쩌라고. 고아를 만들 순 없어. “
죽음의 공포를 밀어내자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악다구니가 치밀어 올랐다. 영이는 허공을 향해, 그리고 저 아래 도사리고 있는 추악한 권력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사탄아, 물러가라! 이 더러운 마귀 새끼야! 나를 괴롭히지 마!”
수만 명에게는 은혜로운 목자일지 몰라도, 그녀에게 그는 영혼을 갉아먹는 마귀일 뿐이었다. 한 번 터져 나온 외침은 용기가 되었다. 소리를 지르고 나니 거짓말처럼 두려움이 씻겨 내려갔다.
‘그래, 한 학기만 버티자. 졸업만 하면 번듯한 직장에 갈 수 있어. 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지옥 같은 한 학기를 반드시 이겨내고 말겠어.’
난간에서 내려온 영이의 눈빛은 이전과는 달랐다. 슬픔에 젖어 있던 눈동자에는 이제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어미의 독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침묵 속에 미소 짓는 영이를 보며 교인들은 ‘날개 없는 천사’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목사의 추잡한 추행과 괴롭힘에 속이 타 들어가 밥도 한 술 뜨지 못하고 뼈만 남도록 말라가는 영이의 사정은 꿈에도 모른 채, 그저 야윈 모습마저 가련하고 아름답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느 날, 교회 임원들이 모인 회의실에서 다과를 내오던 영이의 등 뒤로 목사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꽂혔다.
“우리 영이 비서, 정말 연예인 같지 않나요? 난 살면서 이런 미모는 처음 본다니까. 이런 여자를 과부로 썩히기엔 너무 아깝지 않아?”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하지만 거룩한 장로라는 작자들은 제지하기는커녕,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한술 더 떴다.
“허허,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옛날 같으면 이런 과부는 제일 먼저 보쌈해 가는 놈이 임자였을 텐데 말이죠, 하하하!”
기가 막혀 손이 떨렸지만 영이는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그때였다. 구석에서 독기 서린 눈으로 지켜보던 목사 사모가 찬물을 끼얹듯 내뱉었다.
“예쁘긴 뭐가 예뻐요? 다들 눈깔이 삐었나? 그거 다 화장발인 거 몰라요?”
영이를 쏘아보는 사모의 눈은 질투와 시기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나를 두고 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 여기가 정말 교회인가?’ 영이는 미칠 것 같은 심정을 억누르며 졸업까지만 참자 다짐했다.
퇴근길, 모든 정리를 마치고 나서려는데 사모가 영이를 불러 세웠다. 그녀의 손엔 큼지막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영이 씨, 오늘 수고 많았어. 집에 먹을 게 넘쳐나서 좀 챙겼으니 가져가서 애들 줘.”
뜻밖의 호의였다. 영이는 아까 화낸 게 미안해서 마음을 돌린 건가 싶어, 잠시나마 그녀를 원망했던 마음이 죄스러워질 정도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친정집 문을 열자, 어린 남매가 “엄마!” 하고 달려 나와 품에 안겼다. 영이는 당당하게 사모가 준 쇼핑백을 딸아이에게 건넸다. 엄마로서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모처럼 어깨가 펴졌다.
하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들려온 친정엄마의 목소리에 영이는 얼어붙고 말았다.
“영이야, 이게 다 뭐냐?”
딸아이가 좋아하며 열어젖힌 쇼핑백 안에는 기괴하고도 악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고급 과자 상자들은 하나같이 비어 있었고, 심지어 고추장통 안에는 다 먹고 남은 벌건 고춧가루 찌꺼기만 눌어붙어 있었다.
“할머니, 엄마가 쓰레기를 가져왔어!”
아무것도 모르는 딸아이의 천진난만한 외침에 영이는 망연자실했다.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정교하게 계산된 모욕이었다. 늙고 뚱뚱한 남편을 누가 가질세라, 질투에 눈먼 사모가 어린아이들의 동심마저 짓밟으며 던진 ‘쓰레기’였다.
오징어보다 못한 남편을 성자처럼 떠받들며 유치한 심술을 부리는 사모의 꼴에, 영이는 분노를 넘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추악한 부부의 밑바닥을 보고 나니, 이제는 그들에게 느꼈던 일말의 두려움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쓰레기 쇼핑백은 천사 같던 영이의 심장에 불을 지핀 꼴이 되었다. 모욕당한 어미에게 남은 것은 더 이상 가냘픈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이를 단숨에 강인한 여전사로 탈바꿈시킨 부스터였다.
‘그래, 어디 끝까지 가보자. 너희는 인간도 아니야.
두고 봐. 이제 절대 참지 않을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