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피우는 남자들 4

영예의 2위 -1

by 미뇽작가


스물일곱, 가장 찬란해야 할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을 때 엄마의 세상은 차디 찬 겨울바다 같이 황량했다.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날이 없었다.

차라리 그를 따라 세상을 등질까 수천 번을 망설였지만, 발치에서 재롱을 부리는 서너 살배기 남매의 웃음소리가 엄마의 발을 붙잡았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삶, 그것은 형벌이었다.


엄마가 기댈 곳은 오직 신 뿐이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이 아이들과 그저 행복하게만 살게 해 주세요.”

매일 기도하고 울부짖으며 매달렸다.

헌신적으로 교회를 다니고 봉사하며 신의 뜻대로 살면, 언젠가는 이 지독한 어둠 속에도 볕이 들 거라 믿었다.


다행히 엄마가 다니던 대학교는 기독교 재단이었고, 학교는 장학생이었던 엄마에게 교회사무실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다. 교회 주보를 만들고 살림을 도맡는 경리직이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동료 전도사와 점심 한 끼를 먹었다는 이유로 그의 아내가 들이닥쳐 난동을 피웠다.


“ 둘이서 데이트했지? 내 남편한테 꼬리 치면 가만 안 둘지 알아! ”라는 어이없는 비난이 엄마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 모욕감 속에서 업무를 이어가는 것은 지옥 같았다.


그때 손을 내민 것이 그 교회 목사였다. 그는 개인 비서 자리를 제안하며 집무실 바로 앞에 책상을 마련해 주었다. 배려 깊은 구원자라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것은 더 큰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렇다. 엄마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 '최악의 남자 2위', 는 바로 그 목사였다.


그는 성도 수만 4만 명에 육박하는 대형 교회의 스타 목사였는데 귀신을 쫓는 영험한 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의 안수기도 한 번을 받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던 그 화려한 성전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엄마의 소리 없는 비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괴롭힘은 교묘하고 집요했다.

쉰을 갓 넘긴 목사는 영이에게 아버지뻘이나 다름없었지만 그가 영이를 대하는 방식에는 단 일 퍼센트의 부성(父性)도 섞여 있지 않았다.


비서라는 명목하에 주어진 일들은 점차 기묘한 영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목사의 스케줄 관리와 식사를 챙기는 것도 모자라서 설교단에 오르기 전 그의 머리 모양을 매만져주는 것부터, 그날의 기분에 맞춰 의상과 넥타이를 골라 바치는 것까지 모두 영이의 몫이었다.


성스러운 설교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닫힌 집무실 안에서, 영이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갇힌 채 서서히 조여 오는 불쾌감을 견뎌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를 앞두고 준비된 의상을 전달하기 위해 영이는 평소처럼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목사님, 옷 가져왔습니다.”


안에서 나직하게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렸다.

영이는 아무런 의심 없이 문을 열고 발을 들였지만 마주한 광경에 영이는 숨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거대한 책상 너머,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며 수만 명의 영혼을 호령하던 그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완전히 벌거벗은 몸으로 앉아 있었다.


수치심도, 당혹감도 없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얼어붙은 영이를 훑었다. 성전의 가장 깊숙하고 내밀한 곳에서, ‘영험한 목사’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본색이 그 노골적인 알몸과 함께 드러난 순간이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복도를 질주하는 영이의 귓가에는 제 심장 박동 소리가 천둥처럼 몰아쳐서 금방이라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설마, 실수였을 거야. 내가 너무 갑자기 들어간 탓이겠지. 그래,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영이는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몇 번이고 자신을 속였다.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직장이었고, 신의 말씀을 전하는 분이 그럴 리 없다는 마지막 믿음의 끈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각인된 그 기괴하고 추악한 잔상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 밤새 영이를 괴롭혔다.


다음 날, 영이는 납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출근했다. 어제 일은 사고였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자고 수천 번 다짐하며 매일 해오던 거처럼 목사가 즐겨 마시던 허브차를 우려 집무실로 들어갔다.


잔을 내려놓기 위해 책상 위로 조심스레 허리를 숙이던 순간 정적을 깨고 머리 위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흥분했어?”


찻잔을 잡은 영이의 손이 눈에 바르르 떨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목사의 눈에는 어제의 알몸보다 더 노골적이고 비열한 탐욕이 서려 있었다.


영이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며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을 돌려 나가려는데

거칠고 두툼한 손이 영이의 엉덩이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경악스러운 손길에 영이가 얼어붙자, 귓가로 야비한 웃음소리가 뱀처럼 파고들었다.


“솔직히 말해봐. 너도 젊은데 남자가 그립잖아? 아 그렇게 야한 눈으로 쳐다보니까 내가 미치겠잖아.

세상천지에 널린 그렇고 그런 놈들 말고, 나같이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야 네 팔자가 피는 거야.”


능력 있는 남자. 신의 이름 뒤에 숨어 성도들의 고혈을 짜내고 영혼을 유린하는 그 권력이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영이를 겁박하고 있었다.


영이는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삼키며,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대답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영이는 이를 악물고 집무실을 빠져나와 뺨을 타고 흐르려는 눈물을 닦아내며 겨우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다.


그곳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여신도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목사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우리 목사님 진짜 능력이 어마어마해! 귀신도 우리 목사님 앞에서 꼼짝을 못 하잖아!”


“그런데 아까 목사님 보셨어요? 쓰러진 성도를 품에 안아 일으켜주시는데 어쩜 그렇게 은혜롭던지.”


“그러게 말이야. 그 넓은 품에 나도 한 번만 안겨봤으면 소원이 없겠어, 호호호!”


식탁 위로 흩어지는 웃음소리들이 영이의 귀에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날아와 박혔다.


방금 전 그 ‘넓은 품’을 가진 분이 어떤 추악한 손길을 뻗었는지, 그 입술로 얼마나 더러운 말을 내뱉었는지 폭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4만 명의 성도들에게 그는 신과 맞닿은 성자였고, 영이는 그저 은혜를 입어 일자리를 얻은 가련한 과부일 뿐이었다.


진실을 말해도 믿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절망감이, 방금 겪은 수치심보다 더 깊고 어두운 늪이 되어 영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입안의 밥알은 모래알처럼 까칠했고, 목구멍은 바늘이라도 돋은 듯 꽉 막혀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영이는 도망치듯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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