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그날의 장면은 마흔이 넘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할머니는 평소보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만 세 살, 네 살밖에 안 된 우리 남매를 평소보다 더 꼼꼼히 씻기더니, 가장 좋은 옷들을 꺼내 입히셨다. 내 삐죽거리는 머리칼도 물을 묻혀가며 정성껏 쫑쫑 땋아주셨다.
'어디 좋은 곳에 가나? 누구 결혼식이라도 가는 걸까?'
들뜬 마음으로 따라나선 길 끝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화려한 예식장이 아니라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 가득한 병원이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병원 매점 앞 의자에 앉혀두었다.
그날따라 할머니는 이상하리만큼 너그러웠는데 평소라면 이 썩는다며 단칼에 거절했을 과자와 음료수, 아이스크림까지 고르는 대로 다 사주셨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우리가 먹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그날의 매점은 마치 세상의 모든 금기를 허락해 준 낙원 같았다.
나의 기억은 딱 거기서 멈춰 있는데 할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그 후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날 네 아빠는... 사경을 헤매느라 의식이 왔다 갔다 했어.”
할머니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축축하게 적셨다.
“의사가 이제 마지막으로 의식이 좀 돌아온 것 같으니 사람을 들이라 하길래, 너희를 데리고 병실로 올라갔지. 문을 여니 이미 네 아빠는 배에 복수가 가득 차서 남산만 해져 있더구나. 숨을 한 번 내뱉을 때마다 헐떡이면서 말이야.”
할머니 애써 눈물을 참아가며 말해보려고 하셨다.
“너희 아빠가, 너희들 보고 이리 오라고 손짓했어.
마지막으로 자식새끼들 만져보고 싶어서...
그런데 너희는 변한 아빠의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웠던 게야. 도무지 곁에 가질 않더라.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내가 대신 다가가서 그 손을 덥석 잡았어.
’ 전 서방,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부모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일이야!‘하고 악을 쓰고 소리를 쳤지.”
“그랬더니 내손을 꼭 잡고, 숨 쉬는 것도 힘겹게 말하더구나.”
‘어머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영이(엄마), 꼭 다시 시집보내 주세요. 좋은 사람 만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이 아이들... 이 어린것들은 어머니가 친자식처럼 돌봐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고 말이야.”
할머니는 그 지독한 부탁 앞에 참지 못하고 목놓아 울었다고 했다.
“내가 그랬어. 이 사람아, 이 몹쓸 사람아! 어딜 간다고 이 무거운 숙제를 나한테 던져주고 가는 거야!
못 가네, 절대 못 가네! 어서 일어나 보게!
그런데... 그 말에 대답도 못하고, 그 사람은 눈도 다 못 감고 그렇게 떠났어.”
할머니의 뜨거운 눈물이 내 심장까지 내려앉는 거 같았다.
그날, 차마 감기지 못한 아빠 눈을 엄마가 오열하며 감겨주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아빠와 약속했다고 한다.
“전서방 편히 가시게 … 아이들은 걱정 말고 가시게. 이제 내 딸이고 내 아들로 키울 테니 아무 염려 마시게”
할머니는 나를 꼭 안고 내 눈물을 닦아주며 이야기하셨다.
“네가 태어나던 날, 네 아빠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기뻐했어. 병원 청소하시는 분에게까지 고맙다며 돈을 쥐여줄 정도였으니까. 자동차가 귀하던 그 시절에 너를 인형처럼 꾸며서 차 뒷좌석에 태우고는, 전국 팔도 좋은 곳이란 곳은 다 데리고 다녔지. 귀한 것, 맛난 것만 찾아 먹이며 너를 정말 공주처럼 키웠단다.”
할머니는 마치 짧고도 행복했던 아빠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미소 지었다.
“아빠는 너를 정말 사무치게 사랑했어. 살려고, 너희랑 더 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명이 거기까지였던 거야. 사람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거야.”
깊은 밤, 할머니의 목소리는 자장가처럼 나를 토닥였다. 펑펑 울다 지쳐 할머니의 팔을 베고 누운 내 머리카락을 할머니는 연신 쓰다듬었다.
그토록 사위를 원망하며 욕하던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왜 들려주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할머니는 내 가슴에 난 결핍의 상처를 낫게 해 주신 거였다.
아빠가 없어서 불쌍한 아이가 아니라, 너희는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태어난 내 새끼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게 분명하다.
그날 밤, 나는 비로소 아빠에 대한 원망을 지우고, 할머니의 딸로 다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