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1위 -1
폭풍 같은 시련을 뒤로하고, 영이의 삶에도 비로소 잔잔하고 따스한 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보답이라도 하듯,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영이 역시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 꽃다운 나이에 왜 혼자 사느냐,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라"며 성화였지만, 영이에게는 그 어떤 유혹도 아이들의 눈망울보다 귀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영이의 유일한 우주였고, 동시에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자랄수록 눈치가 빨라진 아이들은 엄마가 혹여나 자신들을 두고 떠날까 봐 노심초사했다.
"엄마, 시집가지 마. 우리 두고 어디 가지 마, 응?"
어린 남매의 애원 섞인 목소리는 영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특히 어린 딸은 밤마다 엄마의 손을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꼭 움켜쥐고서야 잠이 들었다.
'그래, 너희만 있으면 돼. 이 손 절대 놓지 않을게.'
비록 회사에서 제공하는 무상 임대 사택이었지만, 그곳은 세상 그 어떤 궁궐보다 안전하고 따뜻했다.
비릿한 욕망을 숨긴 남자들도, 위선으로 가득 찬 사모의 눈초리도 없는 오직 세 식구만의 완벽한 성전이었다.
좁은 방 안에서 셋이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이면, 영이는 비로소 남편을 잃고 세상을 등지려 했던 그날의 어둠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느꼈다.
놀랍게도 영이는 그토록 추악한 목사에게 당하고도 신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난의 시간 속에서 자신을 지켜준 주님께 늘 감사했다.
화려하고 거대한 대형 교회 대신, 소박하고 따뜻한 작은 가족 같은 교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영이는 자신의 전공인 유아교육을 살려 매주 유치부 전도사로 봉사했는데 영이에게도 치유의 시간이었다.
마귀 같은 목사 밑에서 보냈던 지옥 같은 시간은 이제 먼지처럼 털어버린 채, 영이는 진정한 사랑과 봉사의 의미를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절이 되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할머니집에 가니 좋아 신이 났고
이미 집 안은 모여든 친척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안부가 오가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화살은 또다시 영이에게로 향했다.
"영이야, 너는 그 꽃다운 나이에 왜 아직도 혼자니? 이러다 그냥 늙어 죽을 셈이야?"
여기저기서 참견 섞인 걱정들이 쏟아졌다.
불쾌할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영이는 익숙하다는 듯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띠며 고모부에게 다가가 팔짱을 꽉 꼈다.
"글쎄요, 저는 고모부보다 더 좋은 남자는 아직 못 본 것 같은걸요? 고모부 정도 되는 분만 소개해주시면 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요!"
영이의 너스레에 고모부도 허허 웃음을 터뜨렸고, 곁에 있던 고모는 눈을 흘기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쟤는 고모부를 예전부터 따르더니! 너 분명히 말했다? 고모부 같은 사람만 있으면 결혼하겠다고!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야! “
고모는 곧바로 남편을 돌아보며 채근했다.
"여보, 당신 직장에 괜찮은 총각 있으면 얼른 알아봐요. 우리 영이 눈높이가 이렇게 높은 줄 몰랐네!"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거실 가득 퍼져 나갔다.
영이의 재치 있는 답변 덕분에 곤란했던 질문은 어느새 즐거운 농담이 되어 명절의 밤을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다.
떠들썩했던 명절이 지나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명절의 잔상이 가실 때쯤, 고모부에게 전화가 왔다.
"영이야, 이번 주에 언제쯤 시간 낼 수 있겠니?"
영이는 그 질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명절날 고모부의 팔짱을 끼고 호기롭게 내뱉었던 농담이 화살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영이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듯 대답했다.
"아이, 고모부! 정말 왜 그러세요. 저 소개팅 안 해요. 그냥 맛있는 밥이나 한 끼 먹으면 사주세요. “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넘겨보려 했지만, 수화기 너머 고모부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진지했다.
"그래, 그럼 밥 사줄 테니까 이틀 뒤에 휴가 내라."
"네? 휴가요? 그냥 저녁이나 먹는 게 아니고요?"
"긴말 말고 회사에 미리 얘기해 둬. 맛집이 좀 멀어. “
전화를 끊고 난 영이의 마음속에 묘한 떨림과 걱정이 교차했다. '단순히 밥만 먹는 자리는 아닐 텐데...' 하는 생각에 달력을 바라보는 영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고모. 겨우 네 살 차이라 언니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지냈던 사람. 비록 대문 앞에 버려진 업둥이였다는 사실을 온 가족이 쉬쉬하며 비밀로 지켜왔지만, 영이는 그 가여운 사연을 알기에 고모와 고모부를 더 살갑게 챙겼기에 사이가 매우 돈독했다.
남편이 죽고 영이가 힘들어할 때에도 고모부부는 바로 달려와 위로해 주고 영이 아이들에게 철마다 용돈을 아끼지 않았다. 친고모는 아니었지만 각별했다.
차는 서울의 번잡한 풍경을 벗어나 한참을 달렸고,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이 낯설어질 때쯤 어느 고즈넉한 동네에 도착했다.
고모부가 데려간 곳은 소문난 맛집인 듯 입구부터 정갈한 분위기가 풍겼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며 영이는 내심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누군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며 주위를 살폈지만, 예약된 자리에는 오직 두 사람을 위한 식기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음식이 차례로 나오고 식사가 중반쯤 이어졌을 때까지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영이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슬쩍 운을 뗐다.
"고모부, 저 오늘 소개팅 시켜 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저 사실 엄청 긴장하고 왔거든요."
그러자 고모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