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피우는 남자들 8

대망의 1위 - 2

by 미뇽작가



차는 서울의 번잡한 풍경을 벗어나 한참을 달렸고,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이 낯설어질 때쯤 어느 고즈넉한 동네에 도착했다.


"고모부, 저 오늘 소개팅 시켜 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저 사실 엄청 긴장하고 왔거든요."


영이의 장난 섞인 질문에 고모부는 허허,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젓가락으로 맛깔스러운 반찬을 영이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소개팅은 무슨. 너 혼자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이 많은데, 이런 먼 데까지 와서 느긋하게 밥 한 끼 먹을 여유가 어디 있었겠니. 그냥 너 맛있는 거 좀 먹이고 싶어서 오자고 했어. 맛은 있지? 이것도 좀 먹어봐. “


무심한 듯 던지는 그 한마디에 영이의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소개팅에 대한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모부의 듬직하고 따뜻한 위로가 가득 채워졌다.


영이는 모처럼 아이들 걱정, 일 걱정을 내려놓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차려진 정성스러운 식사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후, 돌아가는 차 안에서 노곤해진 영이가 깜빡 잠이 들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면서 당연히 서울에 거의 다 왔겠지 하고 창밖을 보았는데 창밖으로 어둠이 내린 강가가 보였고, 차가 멈춰 선 곳은 서울과는 정반대 방향에 위치한 어느 한적한 모텔 앞이었다.


영이는 눈을 의심했다. 방금까지 따뜻하게 음식을 건네주던 고모부의 친절과 배려를 떠올리려 애썼지만, 눈앞의 풍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여긴 무슨 일로 세우신 거예요?"

영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고모부의 옆얼굴을 살폈다.


그러자 핸들을 잡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영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식당에서의 친절했던 웃음은 온데간데없었고 굳은 표정으로 감춰왔던 본색을 드러냈다.


"영이야, 너 명절에 친척들 다 보는 앞에서 나 좋다고 팔짱 끼고 그랬잖아.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영이의 심장에 박혔다.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 힘든 삶의 유일한 버팀목 중 하나라고 믿었던 이의 배신이었다.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차 안의 좁은 공간은 숨이 막힐 듯한 공포로 가득 찼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공포 속에서도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간신히 입을 뗐다.


"고모부..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한다고 한 건... 아빠처럼 든든하고 좋은 분이라서,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거예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되돌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핸들을 툭툭 치며,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영이야, 너랑 나랑 피 한 방울 섞인 것도 아니잖아? 남녀 사이에 아빠는 무슨."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식조차 벗어던진 노골적인 탐욕이었다. 남자는 마치 대단한 제안이라도 하는 양 영이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가끔 만나서 서로 외로움 좀 달래면 좋은 거지, 안 그래? 너도 혼자 애 키우느라 힘들고 외로울 텐데, 나 같은 사람 하나 옆에 두면 서로 좋잖아."



남자는 이제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시트를 뒤로 젖히며 영이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영이가 알던 다정한 고모부의 것이 아니었다.


" 난 아니야. 난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줄곧 좋아했어."


그의 말은 고백이라기보다 차라리 선고에 가까웠다.

영이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끼며 차 문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남자는 추억이라도 회상하는 듯 몽롱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처음 인사하러 왔을 때 기억나?

그때 네가 스무 살이었지. 난 너처럼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어. 내 눈엔 항상 너만 보였다고."


"제발 그만하세요……."


"너도 항상 날 보고 웃었잖아. 명절 때마다 나한테 다정하게 굴고, 이번에도 먼저 팔짱 끼면서 밥 먹자고 한 거, 그거 다 내가 좋아서 그랬던 거 아니야? 네 마음도 나랑 같은 줄 알았는데. “


영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모부는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의 부장이었다.

하지만 처음 고모와 결혼할 때만 해도 그는 백수나 다름없는 처지에 지독히도 가난했다.

그런 그를 거둔 것은 영이네 가족이었다.


영이의 아버지는 대문 앞에 버려졌던 업둥이 여동생이 혹여나 고생할까 싶어, 제 집 거실에서 두 사람의 동거를 허락했고 나중에는 신혼집까지 손수 마련해 주었다.


고모가 불임이었기 때문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래도 둘은 늘 연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서로를 아끼며 살았다. 교회 생활도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고아원을 찾아 자원봉사를 거르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고모부는 그야말로 '천사' 그 자체로 통하는 남자였다.


영이 가족의 은혜로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인 그 남자가 조카인 자신에게 처음부터 흑심을 품고 있었다니.

영이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을 아껴주던 다정한 눈길과 따뜻한 손길이 모두 추잡한 욕망을 가리기 위한 가면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너도 나도 이렇게 늙을 바엔 그냥 몰래 사랑하자. 너만 입다물면 아무도 몰라.”


남자는 여전히 비겁한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그저 목소리를 높여 겁을 주면, 예전처럼 말없이 빙긋 웃기만 하던 연약한 조카딸이 제풀에 꺾여 순종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영이가 지나온 고난의 세월이 그녀를 얼마나 단련시켰는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일하고, 세상의 날 선 편견에 맞서 홀로 두 아이를 키워낸 영이는 이제 여전사가 아니던가.


하지만 문득 얼마 전 뉴스에서 보았던 연쇄살인 사건이 뇌리를 스쳤다. '여기서 성급하게 반항했다간 죽을지도 몰라. 그럼 남겨진 내 아이들은 어쩌지…….'


절박한 순간, 그녀는 기도밖에 할 게 없었다.

‘주님,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지혜를 주세요. 이 악마를 물리쳐주세요.’




영이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입을 뗐어.

"고모부, 우리 모두 신앙인이잖아요.

저도 고모부 좋아하죠. 하지만 이러는 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거예요."


그러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영이야, 난 이미 죄 덩어리야. 밤마다 네 생각에 미칠 것 같아. 그러니까 제발, 그냥 한 번만 하자."


남자는 이미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고 있었고 신앙으로 달래는 것은 애초에 가당치도 않았다.


하지만 영이가 숱한 유혹과 위협 속에서도 자신과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위기의 순간마다 섬광처럼 스치는 지혜 덕분이었다.


악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탐욕에 눈이 멀어 제풀에 고꾸라지도록 발을 걸어 넘어뜨려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영이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조금 전까지의 서슬 퍼런 기세는 간데없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배를 움켜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우, 배야……. 고모부, 아까 먹은 간장게장이 아무래도 상했나 봐요. 갑자기 속이 너무 뒤틀리네요.”


갑작스러운 변화에 남자의 눈에 서렸던 음흉한 빛이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영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일단 고모부 먼저 방에 올라가 계세요. 저는 여기 1층 화장실에 좀 들렀다가 금방 올라갈게요.”


남자는 영이를 놓치기 싫은 듯 조바심을 내며 대꾸했다.

“아니, 뭘 따로 가! 같이 올라가서 방에 있는 화장실 쓰면 되지.”


영이는 더욱 능청스럽게, 예의 그 눈부신 미소를 살짝 섞어 애교 섞인 콧소리를 냈다.


“아잉, 고모부도 참. 냄새날까 봐 그러죠! 창피하게……. 먼저 올라가서 씻고 기다리고 계세요. 저 금방 따라갈 테니까.”



빙긋 웃는 영이의 얼굴에 남자는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자신의 추잡한 욕망이 드디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는 착각에 빠진 남자는 비열한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영이는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나지막하고 달콤한 목소리를 던졌다.


“고모부, 저 금방 갈 테니까 먼저 천천히 샤워하면서 기다리고 계세요.”


남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영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깨끗이 지워졌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는 척하다가 몸을 틀어 카운터로 전력 질주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영이를 보고 모텔 주인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저기요, 제발 살려주세요! 빨리 택시 좀 불러주세요! 저 위로 올라간 남자가 지금 저를 어떻게 하려고 해요!”


영이의 절박한 목소리와 파르르 떨리는 눈빛에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주인은 군말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걱정 마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가 도착했고 영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모텔 창가 어디쯤에서 샤워기 물소리를 들으며 헛된 꿈을 꾸고 있을 그 남자를 버려둔 채였다.


집 도착하니 아이들은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어있었다. 그 모습이 처량해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꾹 참고 깨워 옷을 입혔다.. 영문도 모른 채 눈을 비비는 아이들을 양옆에 끼고, 곧장 친정집으로 향했다.


깊은 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딸의 모습에 영이 엄마가 잠결에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딸의 눈은 이미 피눈물을 쏟은 듯 퉁퉁 부어 있었다. 엄마는 딸의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긴 설명할 필요 없이 엄마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