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피우는 남자들 9

대망의 1위 -3

by 미뇽작가


강한 척, 여전사처럼 버텼던 영이는 엄마 앞에서 아이처럼 무너져 내렸다. 엄마는 떨리는 손으로 딸을 덥석 안았다. 엄마의 품 안에서 아이처럼 엉엉 우는 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찢고 번져 나갔다.


둑이 터진 듯 오열이 터져 나왔고, 고모부가 저지른 추악한 짓들을 하나하나 쏟아냈다. 이야기를 듣던 엄마의 얼굴은 경악으로 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라고? 그래서, 그놈이 너한테……! 이 죽일 놈의 새끼가 진짜! 감히 네 몸에 손을 댔단 말이냐?!"


엄마의 천둥같은 비명에 건넌방에서 잠을 자던 영이의 아버지와 다섯 명의 남동생이 놀라서 거실에 몰려나왔다.


평소 누나를 끔찍이 아끼던 동생들은 누나의 퉁퉁 부은 눈과 엄마의 통곡 소리만으로도 상황을 직감했다.


"누나, 그놈 지금 어디 있어? 어떤 새끼야!"

첫째 동생이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하자, 나머지 네 동생도 약속이라도 한 듯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거기 모텔 이름이 뭐야? 당장 가서 죽여버리게! 그 새끼 아직 거기서 샤워하고 있다고?"


“아 됐고! 경찰에 신고부터 하자! 그런 새끼는 콩밥을 먹여야 해! “


유독 우애가 깊었던 다섯 형제에게 큰누나 영이는 부모님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고 매형이 죽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누나는 바라만 봐도 늘 애처로웠다.

그런 누나를 감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기만하고 짐승처럼 대하려 했다는 사실에 동생들의 눈에는 시뻘건 핏발이 섰다.


"그만들 해라. 지금 가봤자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게다."

아버지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거실의 소란을 잠재웠다. 아들들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렸지만,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를 보고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버지의 속은 영이보다 더 처참하게 찢어지고 있었다. 내 소중한 딸이 겪었을 수치심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놈의 모가지를 채 오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가여운 여동생이 마음에 걸렸다.


"내 여동생…… 고모 말이다. 갓난아기 때 우리 집 대문에 버려진 그 아이를 우리가 어떻게 키웠는지 알아? 업둥이라고 손가락질받을까 봐 내 자식보다 더 애틋하게 단속하며 키운 동생이잖아. “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 사실이 폭로되면…… 그 불쌍한 것이 감당할 수 있겠어? 제 남편이 조카에게 짐승 같은 짓을 하려 했다는 걸 알면, 고모는 이제 어디로 가겠어. 아마 세상이 무너지는 상처를 입고 평생 고개도 못 든 채 살 거야. “


아버지는 딸에 대한 미안함과 동생에 대한 가련함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했다. 영이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려왔다. 아버지는 영이의 고통을 몰라서 참으시는 게 아니었다. 차마 제 손으로 애지중지 키운 여동생의 삶까지 지옥으로 밀어 넣을 수 없는, 이 집안에서 가장 고독한 싸움을 하고 계신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그럼 우리 누나는요? 우리 누나 억울한 건 어쩌고요!"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길길이 날뛰던 남동생들도 아버지의 완강한 태도 앞에서 결국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거실을 채웠던 살벌한 기세는 연기처럼 흩어지고, 형제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각자의 방으로 돌어갔다. 억울함에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았지만, 영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삼킬 뿐이었다.


그 후 며칠간, 영이는 회사에 휴가를 냈다.

엄마가 꾹꾹 눌러 담아준 밥을 먹으며 무너진 마음을 겨우 추슬렀고, 다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보금자리인 사택으로 돌아왔다.


일상으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 전화가 걸려왔다. 고모부였다. 영이는 잠시 망설이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영이야, 나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다오.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내가 미쳤었나 봐. 제발 부탁이다, 영이야.”


비겁하고 탐욕스러웠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비굴할 정도로 싹싹 비는 애원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영이는 당황스러웠어. 그사이 아버지가 그를 만나 호되게 꾸짖으신 걸까?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영이는 소름 끼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진심 어린 참회인지, 아니면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부리는 비겁한 연기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남자는 지금 무언가에 지독하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잊으라 하셨고, 동생들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폭풍 전야의 정적일 뿐이었다.


영이에게는 이른바 ‘독수리 오 형제’라 불리는 다섯 남동생이 있었는데 평소 지독하게 말도 안 듣고 온 동네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던 그들이었지만, 제 누나의 눈물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위인들은 아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