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1위 -5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앳된 얼굴의 막내가 가방을 어깨에 멘 채 들어왔다. 셋째와 넷째에게 얻어맞고 첫째와 둘째에게 영혼까지 털린 고모부는 이제 중학생 조카의 얼굴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며 침대 구석으로 몸을 웅크렸다.
"고모부, 많이 아파요?"
막내는 침대 옆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해맑게 웃었지만 그 눈빛은 형들보다 훨씬 더 공허하고 기괴했다. 막내는 주변을 쓱 살피더니, 고모부의 귀에 입을 바짝 갖다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악학 우리 누나랑 헥헥헥 콩떡콩떡 했어요? “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는 막내를 보고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안 했어. 내가 했으면 억울하지도 않아! 안 했어!”
남자는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
그러자 막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두루마리 휴지에 손가락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 능글맞게 말했다.
“에이! 했지? 했잖아! 거기까지 가서 안 했을 리 없지!
"근데 고모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
막내는 가방에서 커다란 쇼핑백을 꺼내 침대 위에 툭 던졌다.
"용돈 좀 주세요, 고모부. 아주 많이!!
형들이 그러는데 대기업 다녀서 고모부 돈 많다며?
이거 안 채워주면 나 라디오에 사연 보낼 거야 별이 빛나는 밤에^^
우리 고모부가 조카랑 응응 응응하려다 그 동생들에게 뒤지게 맞아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렇게 쓰면 되지? “
"너... 너 지금 협박하는 거냐?"
"협박은 무슨~ 이건 위로금!이지
누나 마음 아프게 한 거, 막내 동생인 나한테 용돈으로 갚으라는 거야. 고모부 이 개족소세지야. 맞아서 고막 나갔어? 왜 말길을 못 알아 처먹어!
나 중학생이라 사고 쳐도 법 안 걸리는 거 알지?
와 씨~ 갑자기 열이 확 받네. 링거 줄 확 뽑아서 확 졸라 버릴까 보다. “라고 말하며 막내는 눈동자를 뒤집어 깠다.
‘상또라이'라던 형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막내는 선과 악의 구분조차 없는 아이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상또라이였다.
고모부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열어 현금을 전부 꺼내 넣었다. 하지만 막내는 쇼핑백을 가볍게 흔들어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 고모부. 이거 너무 비어 있잖아. 사나이답게 꽉 채워 줘야지. 나머지는 고모한테 받을까?? 아니지??
내가 오는 길에 보니까 병원 입구에 은행 있더라.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직접 데려다 줄게.
나 되게 착하지? 이정면 천사다 천사 헤헤 “
막내는 거부할 틈도 주지 않고 남자를 휠체어에 구겨 넣듯 앉혔다. 환자복 차림으로 휠체어에 실려 가며 남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푹 숙였지만, 막내는 보란 듯이 휠체어를 거칠게 밀며 은행으로 향했다.
ATM 기기 앞에서 돈을 인출하는 고모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막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두툼해진 쇼핑백을 건네받은 막내는 남자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양손 엄지를 치켜세우고
"우와! 역시 대기업 임원은 급이 다르네. 고모부 최고!"
남자가 비참함에 입술을 깨무는 그 순간, 막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막내는 치켜세웠던 엄지손가락을 천천히 꺾어 내리더니, 가운데 손가락 두 개를 남자의 눈앞에 '쌍'으로 날렸다.
" 고모부는 개뿔. 뒤져 뒤져라 이 새끼야."
막내는 쇼핑백을 어깨에 가볍게 걸치고는, 휠체어에 덩그러니 남겨진 고모부를 그대로 두고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은행을 빠져나갔다.
쇼핑백을 소중하게 챙긴 막내는 곧장 누나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누나가 가장 좋아하는 하얀 백합 한 다발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영이야 나 왔어. 이거 받아.”
“ 너 혼난다. 누나한테 영이가 뭐니?”
막내는 장난치듯 백합 다발과 함께 묵직한 쇼핑백을 영이 앞에 툭 내밀었다. 얼떨결에 봉투 안을 들여다본 영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안에는 상상도 못 할 만큼의 현금 뭉치가 들어있었다.
“너…… 막내야, 너 이거 뭐야? 설마 어디서 훔친 거야? 이게 다 뭐야!”
영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묻자, 막내는 평소의 그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훔치긴 뭘 훔쳐. 그 고모부라는 인간한테 정당하게 받아온 ‘합의금’이야. 누나 마음 고생시킨 값 치고는 좀 적지만, 그래도 일단 이거 써. 이걸로 애들 맛있는 것도 사주고 누나 사고 싶은 거 다 사.”
영이는 백합의 진한 향기와 함께 전해진 동생의 진심에 그만 목이 메어왔다.
누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나쁜 놈’이 되어준 동생들의 마음이 그제야 가슴 깊이 전해졌지. 영이는 돈뭉치보다, 동생이 내민 백합 꽃다발을 더 꽉 껴안았다.
“녀석.. 남편이 주던 백합 기억하네… ”
남편이 살아생전 기념일마다 챙겼던 백합이었다.
오랜만에 맡는 백합향기가 영이의 방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영이는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오렌지주스를 사서 병원에 찾아가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돌려드릴게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다시는 이런 죄짓지 말고 사세요. 이건 용서가 아니라, 제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한 제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얼마 후, 영이의 친정집 거실에는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골 냄비를 앞에 두고 동생들의 유쾌한 대화가 이어졌다.
"근데 셋째야, 너 그때 그 공사장에서 시멘트는 대체 어디서 구했냐? 그거 무거워서 옮기기도 힘들었을 텐데."
둘째의 물음에 셋째와 넷째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형, 그게 진짜 시멘트인 줄 알았어? 그거 그냥 유통기한 지난 밀가루야! 밤이라 깜깜하고 분위기 잡으니까 그 인간이 겁에 질려서 속아 넘어간 거지. 밀가루 쏟아지는 소리에 오줌까지 지릴 줄은 몰랐다니까!"
동생들의 능청스러운 고백에 조용히 미소 짓던 아버지도, 상을 차리던 엄마도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막내는 영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이야 봤지? 앞으로도 누가 누나 괴롭히면 바로 말해. 우리는 누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독수리 오 형제'니까!"
홀로 세상을 버텨내느라 단단해지기만 했던 영이의 마음도, 든든한 동생들의 울타리 안에서 말랑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뒤로 고모부는 어찌 되었냐면?
놀랍게도 그는 여전히 고모와 헤어지지 않은 채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역시 인간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 사건 이후에도 회사 직원과 바람을 피우다 걸려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사네 마네' 난리를 피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세도 다 꺾였다. 자식 하나 없이 그저 강아지 두 마리만 자식처럼 끼고 살뿐이다.
요즘 고모부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늙은 아내의 눈치를 보며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일이다. 대기업 임원으로 목에 힘을 주던 시절의 당당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 굽은 등에 목줄을 쥔 채, 강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초라한 노인의 뒷모습만 남았다.
고모는 오늘도 밥상을 차리며 입버릇처럼 투덜댄다.
"저 원수, 죽지도 않고 또 밥 먹으러 오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완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