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 1
딸의 눈에 비친 엄마의 인생은 '남자 복'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지지리도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고작 스물일곱 살이었던 어린 아내와 핏덩이 같은 서너 살배기 남매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버린 아빠를 시작으로, 엄마의 곁을 스쳐 간 인연들은 늘 상처만을 남겼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단순히 '안쓰럽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연민으로 가득했다.
지방에 거주하시는 엄마는 종종 서울 우리 집에 들러 며칠씩 묵고 가시곤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오후였다. 과일을 깎던 엄마가 문득 고개를 들며 내게 물었다.
"미뇽아, 여기서 일산이 많이 머니?"
"일산? 아마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릴걸? 왜, 누가 거기 살아? 내가 데려다줄까?"
내 질문에 엄마의 얼굴 위로 복잡 미묘한 망설임이 스쳤다.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한참을 머뭇거리던 엄마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사실은… 예전에 알던 사람인데 연락이 닿았어."
엄마의 조심스러운 말투에 나는 눈을 반짝이며 바짝 다가앉았다.
“설마 남자야?"
"후훗, 아니… 아주 오래전 일이야."
엄마는 쑥스러운 듯 헛웃음을 지었지만, 눈가에는 설렘과 긴장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누구인데 그래? 궁금해, 빨리 말해봐."
"내 고등학교 2학년 때, 나 과외해 주던 선생님이야."
의외의 대답에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외할머니네 형편이 그렇게 좋았어? 그 시절에 과외까지 받을 정도였어?"
"응. 내가 대학 갈 때쯤에야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서 포기해야 했지만, 그전까지는 우리 엄마가 과외도 시켜주실 정도로 형편이 나쁘지 않았거든. 공부도 꽤 시키셨고."
엄마의 기억은 어느덧 수십 년 전, 푸르렀던 열일곱 살의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같던 엄마의 과거에 조금씩 생생한 색채가 입혀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외선생님이랑 어떻게 됐는데?"
나의 채근에 엄마는 깎다 만 사과를 내려놓고 아득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차역 대합실의 차가운 공기와 젊은 날의 뜨거웠던 설렘이 교차하는 지점, 엄마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내 과외 선생님이었어.”
엄마의 목소리는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한 소녀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지. 동네에 살던 대학생 오빠한테 과외를 받았는데, 혈기 왕성한 젊은 남녀가 좁은 방 안에서 매일 머리를 맞대고 있으니 자연스레 감정이 생기지 않겠니? 딱히 ‘사귀자’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흐르는 공기가 그랬어. 하지만 네 외할머니 촉이 보통이니?
뭔가 분위기가 야릇하다 싶으셨는지, 결국 그 선생님을 호되게 혼내시더라고.”
엄마는 당시 할머니의 불호령을 떠올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할머니가 그러셨지. ‘공부를 가르치랬더니 연애를 가르쳐? 우리 영이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 하고 말이야. 그 길로 선생님은 쫓겨나듯 군대로 떠나버렸어. 그게 끝인 줄 알았지.”
그 이후의 삶은 파도처럼 엄마를 휩쓸고 갔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그러다 아빠를 만나 결혼을 했다.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기에, 기억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K 선생님’의 존재는 까맣게 잊힌 채 먼지만 쌓여갔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서, 네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내가 뒤늦게 대학에 들어갔을 때였어. 우리 과 애들하고 MT를 가려고 서울역에 모였는데, 과대표가 그만 열차 예매를 잘못한 거야.”
당황한 일행들 사이에서 엄마가 나섰다. 역무원에게 가서 표를 바꿔보자며 창구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던 엄마의 귓가에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영이니…?”
영이는 걸음을 멈췄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이름. 고개를 돌려 보니 한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영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시죠…?”
묻는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 보는 남성의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낯설지 않았다. 안갯속을 헤치듯 기억을 더듬던 영이의 눈이 커졌다.
“나야… K 선생님.”
“어머, 세상에! K 선생님 맞으시죠?”
기차 소음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던 서울역 대합실이 순식간에 정지된 듯했다. 서른이 다 되어 각자의 삶을 살다 기차역 창구 앞에서 마주친 두 사람 사이로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