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유괴당한 이야기 2

by 미뇽작가

할머니가 말한 ‘유괴’가 설마 그 아줌마를 뜻하는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 할머니의 목소리를 타고 흩어졌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래, 나도 기억이 난다.

그 아줌마는 집 근처 중학교의 선생님이었다.

동생과 내가 먼지 풀풀 날리는 공터에서 놀고 있으면, 어느샌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사탕 먹을래? 몇 살이야?

어쩜 이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처음엔 낯설어 대답도 않고 우리끼리만 놀았지만,

아줌마는 매일같이 우리를 찾아왔다.

어떨 때는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자를 적으며 엄한 선생님처럼 굴기도 했다.


“너 ‘어머니’ 써봐, 못 써? ‘아버지’는? 다섯 살이면 이 정도는 쓸 줄 알아야지.”


그렇게 매일 글씨를 하나씩 배우다 보니, 어느덧 경계심은 녹아 없어졌다. 멀리서 아줌마의 실루엣만 보여도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며 “이모!” 하고 달려갔다. 그러면 아줌마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초코파이나 과자 꾸러미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는데, 아줌마가 평소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얘들아, 우리 집에 가서 시원한 오렌지 주스 마실래? 아주 시원하고 달콤한 게 있는데.”


아이들이 술렁였다. 그때 내 단짝 세미가 내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야, 따라가지 마. 우리 잡아다가 껌팔이 시킬지도 몰라!”


순간 기분이 확 상했다. 나에게 글자를 가르쳐주고 맛있는 과자를 주던 ‘나의 이모’를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세미가 쏘아붙이며 당당하게 아줌마의 손을 잡았다.


“우리 이모야. 나쁜 사람 아니거든!”


결국 세미의 손을 뿌리치고 아줌마를 따라나선 건 나뿐이었다. 그분의 집은 어느 건물 2층에 있었는데 복닥거리고 사람 냄새나던 우리 집과는 달리, 그곳은 궁궐처럼 넓고 고급스러웠지만 기이할 정도로 어둡고 정막 했다.


"자, 시원하게 마시렴."


아줌마가 내민 유리잔에는 진한 오렌지 주스가 담겨 있었다. 단숨에 들이켠 주스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달콤했다. 아줌마가 내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우리 예쁜 공주님, 아줌마랑 공주님 놀이할까? 너는 공주님이고, 이모는 시녀가 되는 거야."


아줌마가 이끄는 대로 들어간 방 안에는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예쁜 원피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장난감도 한가득 있는 정말 공주방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몸에 대보았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았다.


아줌마는 정성껏 내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반짝이는 레이스와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몸에 감길 때마다 나는 정말 공주라도 된 기분이었다. 중간중간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하지만 놀이가 끝날 무렵, 기대했던 선물은 없었다. 아줌마는 내 몸에 딱 맞던 그 예쁜 옷들을 다시 빼앗듯 벗겨갔다.


"이 옷, 또 입고 싶지? 그럼 내일 또 아줌마 집에 올래?"


그 옷이 탐이 났던 나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홀린 듯 그 이층 집을 찾았다. 아줌마는 늘 맛있는 간식을 내주었고 내 몸에 온갖 옷을 입혀 보았지만, 단 한 벌도 내 손에 쥐여주지는 않았다. '내일'이라는 약속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세 번째 날이었을까. 평소처럼 옷을 갈아입으며 공주님 놀이에 푹 빠져 있을 때,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할머니가 들이닥쳤다. 내 기억은 거기서 뚝 끊겨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이어서 한 말은 내가 알던 기억의 뒷면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 여자, 자식이 없었어. 여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 열병으로 죽었다더구나. 아마 그 애가 살아있었으면 딱 너만 했을 거야. 죽은 딸아이 생각에 미친 듯이 옷을 사 모은 거지. 한 번 입혀보지도 못할 옷들을 방 안 가득 채울 정도로 말이야. 그러다 네가 눈에 띈 게지."


할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셨다.


"네가 워낙 쫄랑거리며 잘 따르니, 너한테 그 옷들을 입혀보며 죽은 자기 딸이라 상상을 했던 모양이야.

나를 집 안으로 들이더니, 다짜고짜 너를 달라고 하더구나. 동네 사람들 입을 통해 너희가 아비 없이 가난하게 산다는 걸 다 듣고 있었던 게지."


할머니는 미쳤냐며 펄쩍 뛰셨지만, 여자의 제안은 집요하고도 거부하기 힘들 만큼 달콤했다.


"그 여자가 그러더구나. 널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겠다고. 널 입양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공주처럼 키우겠다고 말이야. 좋은 대학도 보내주고, 가끔 안부도 전해줄 테니 제발 자기에게 보내달라며 내 손을 붙잡고 빌더구나."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잘라냈지만, 돌아온 집안의 풍경은 시리도록 가난했다. 할머니의 마음속에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이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 나랑 고생하며 사는 것보다, 그 번듯한 환경에서 귀하게 자라는 게 너를 위한 길이 아닐까…….'


확신은 흔들렸고, 고민은 밤새 할머니의 가슴을 갉아먹었다. 안 된다며 돌아서는 할머니의 등 뒤로, 여자는 마지막까지 간절한 목소리로 매달렸다.


"어르신.. 가족들과 꼭 상의해 보세요.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꼭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그 여자는 돌아가는 할머니의 손에 과일이며 빵이며 먹을 것을 한가득 들려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아줌마에게 “이모 안녕! 내일 또 만나!”라며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그 살가운 목소리가 할머니의 심장을 후벼 팠다.



당시 우리 집은 끼니를 걱정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할머니가 쌀독이 비어 깊은 한숨을 내쉬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천진하게 웃었다.


“할머니, 쌀 없으면 라면 먹자! 난 라면이 더 좋아!”


그 말에 할머니는 뒤돌아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들려온 미국의 교육과 풍족한 환경은, 할머니에게 단순한 유혹이 아닌 '구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보내지 그랬어. 그랬음 나 지금쯤 멋진 미국 사람 되어 있었을 텐데.”

내가 농담 섞인 투정을 부리자, 할머니가 내 등짝을 매섭게 내리치셨다.


“이 썩을 년,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순 헛소리만 하고 자빠졌네! 그래, 나도 너 보내고 네 엄마 새시집 보내고 깔끔하게 끝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그런데, 네 엄마가…….”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네 엄마가 악을 쓰고 울면서.. 엄마, 나 애들 없으면 못 살아. 애들 없으면 당장 약 먹고 죽어버릴 거야!'라면서 뒤로 넘어가는데 , 그걸 어떻게 보내니. 천하의 몹쓸 년 소리를 들어도 새끼 떼어놓는 짓은 차마 못 하겠더라.”



결국 할머니는 그 여자를 다시 찾아갔다.

사정을 전해 들은 여자는 소리 없이 울었고, 할머니도 안쓰러워 같이 눈물을 닦아냈다. 할머니는 그 가엾은 여자의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나를 친정엄마라 생각하고, 애들 보고 싶으면 언제든 놀러 오구려."



그 후, 여자는 차마 가져가지 못한 죽은 딸의 흔적들, 그 산더미 같았던 예쁜 옷들이며 장난감들 전부 우리 집에 내려놓고는 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네가 어릴 때 입었던 그 화려하고 좋은 옷들, 장난감들 사실은 다 그 여자가 주고 간 거였다.”


거실 한쪽에 쌓인 내 아이의 장난감 위로, 수십 년 전 내가 입었던 화려한 원피스와 장난감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할머니가 왜 그토록 증손주의 장난감을 사 대는지, 그 미련스러운 사랑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다음 주 월 수 금 에 할머니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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