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나와 내 동생을 업어 키우셨고, 내 아이가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키워주셨다.
아이가 어릴 때였다.
퇴근길, 현관문을 열 때마다 거실 바닥엔 늘 새로운 장난감이 굴러다녔다. 뿔이 뾰족한 공룡, 폭신한 곰 인형, 반짝이는 미니카들…. 어느덧 아이의 방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장난감으로 가득 찼다. 아이가 조르기만 하면 할머니는 당신의 쌈짓돈을 아낌없이 털어 다 사주셨다.
심지어 똑같은 장난감이 몇 개나 되는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내가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할머니, 제발 장난감 좀 그만 사! 애 봐주시고 받는 용돈,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걸 다 쓰면 어떡해. 정작 할머니 쓸 돈은 하나도 없잖아!”
내 타박에 할머니는 멋쩍은 듯 웃으시더니, 이내 옅은 한숨을 쉬었다.
“……너 어릴 땐 못 사줬던 게, 그게 참 사무치게 마음이 아파서 그래. 지금은 그때보다 형편도 나은데 왜 못 사주겠니.”
나는 억울한 기분이 들어 할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무슨 소리야, 할머니. 그때 돈 없었어도 나 옷이랑 신발은 항상 새 걸로만 사줬잖아. 나 다 알고 있어.”
그러자 할머니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아니, 못 사줬어……. 그때 네가 입고 신었던 거, 그거 다 다른 사람이 사준 거야.” 하셨다.
“누구? 할머니,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사줬는데?”
"기억 안 나니? 너, 그때 유괴됐었어."
‘유괴'라니. 당황한 내가 되물었다.
"내가? 유괴를 당했다고? 정말 기억이 안 나는데."
"응, 아주 잠깐이었지. 잠깐 유괴당했할뻔했다 해야 하나……."
할머니는 농담인 듯 혹은 다행이라는 듯 묘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때 너희가 유독 예뻤어. 아비 없는 자식들이라고 누가 믿었겠니. 너희가 산에서 길을 잃어버렸던 날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지. 다들 너희가 불쌍해서 울고불고 난리였어. 저 쪼그만 것들을 어쩌면 좋냐고 다들 제 일처럼 걱정했어. 그런데 어느 날, 네가 정말 감쪽같이 사라진 거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분명 동네 아이들이랑 골목에서 뛰어놀고 있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너만 없는 거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온 동네를 훑고 다녔지. 그때 네 동생이 코를 찔찔 흘리면서 내 치맛자락을 잡아끌더라.
누나, 저기…… 저기 있어.' 하고 손가락으로 어느 집을 가리키는 거야."
할머니는 그때의 울화가 다시 치미는 듯 가슴을 팍팍 내리치셨다.
"가슴이 콩콩 뛰고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서, 무작정 그 집 대문을 두들겼어! 미뇽아! 미뇽아! 이름을 부르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지."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는 기척조차 없었다. 절망감이 분노로 변해 할머니는 문고리를 부술 듯이 흔들며 최후통첩을 날렸다고 했다.
"당장 문 안 열어? 경찰 부를 거야! 안 열면 당장 경찰 부른다고! 그렇게 악을 썼더니 그제야 육중한 문이 끼익, 하고 열리는거야. 그런데 문틈으로 보인 네 모습에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네가…… 속옷만 입은 채로 거기 서 있었거든."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건, 속옷 차림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손녀딸 뒤로 한 여자가 나타나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머, 죄송해요. 소리를 못 들었네요. 들어오세요.”
그 여유로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화가 치솟아 앞 뒤 재지 않고 할머니가 그 여자의 뺨을 후려갈겼다. 매서운 손바닥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야, 이 천하의 죽일 년아! 너 저기 중학교 선생 아니야? 선생이라는 년이 남의 귀한 애를 데려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애 옷은 왜 벗겨놨어, 어? 너 정체가 뭐야!”
눈이 뒤집혀서 다시 한번 손을 치켜드는데, 그 여자는 피하지도 않았다. 할머니 손등이 얼얼할 정도로 매섭게 휘둘러서 아플 텐데 피하지도 않고 여자는 고개를 떨군 채 연신 고개만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애기가 너무 예뻐서, 정말 너무 예뻐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그 비굴한 사과에 더 화가 치밀어 한 대 더 때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손녀가 앞을 막아서며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 아줌마 때리지 마! 우리 지금 공주님 놀이 중이란 말이야!”
순간 할머니의 손이 일시정지 하듯 공중에서 멈췄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귀를 의심했다.
공주님 놀이라니? 속옷만 입고 있는 애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싶어 기가 찼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할머니가 따져 물으니, 여자가 멍한 눈으로 조심스럽게 방 안쪽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