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 6
그의 무미건조한 사과에 아내는 잠시 침묵하더니, 뜻밖에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만나세요. 난 괜찮으니까, 가서 그 사람 만나시라고요.”
힘겹게 꺼낸 이혼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아내는 평온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K의 심장을 서늘하게 얼려버렸다.
“대신, 약속은 지켜주세요…….”
시간은 다시 영이가 열일곱 살이던 그 푸르른 봄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이는 고등학교 2학년, K는 대학교 3학년이였다. 두 사람은 같은 동네에 살았고, 영이의 엄마와 K의 엄마는 이웃사촌을 넘어 친자매보다 더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동네 아줌마들에게 공부 잘하는 명문대생 K는 탐나는 인재였다. 결국 영이 엄마를 필두로 몇몇 엄마들이 뜻을 모아 K를 찾아가 과외를 부탁했다. K의 가르침은 탁월했다. 몇 달 만에 아이들의 성적이 눈에 띄게 올랐고, 영이 엄마의 어깨도 덩달아 으쓱해졌다.
하지만 그 좁은 공부방 안에서 흐르던 기류는 성적보다 뜨거웠다. K는 영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영이가 아직 여고생이었기에 겉으로 내색할 순 없었지만, 속으로는 ‘영이가 대학생만 되면 반드시 고백하리라’ 수만 번 다짐했다. 영이 역시 무심한 척하면서도 다정한 오빠이자 선생님인 K에게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K는 혼자 있을 때면 연습장에 남몰래 영이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유치한 줄 알면서도 노트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영이, 영이, 영이……’라는 이름들은 그 시절 그의 가장 간절한 기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영이가 드디어 전교에서 손꼽히는 성적을 거두며 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기쁨에 겨운 영이 엄마는 과외 선생님인 K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솜씨 좋은 영이 엄마는 비싼 털실을 꺼내 밤을 새워가며 정성껏 목도리를 짰다.
“우리 영이 가르치느라 고생하는 선생님한테 딱 어울리겠네.”
하룻밤 사이 뚝딱 완성된 정갈한 목도리를 곱게 포장한 영이 엄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K의 집을 찾아갔다.
영이 엄마가 K의 집을 찾았을 때, 현관문은 평소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선생님 계셔?"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영이 엄마는 정성껏 짠 목도리를 두고 갈 요량으로 K의 방으로 들어섰다. 책상 위에 단정히 놓아주려던 찰나, 영이 엄마의 시선이 반쯤 펼쳐진 노트 한 권에 머물렀다.
그것은 K의 비밀 노트였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영이 엄마의 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종이가 뚫어질 듯 빼곡하게 적힌 이름. '영이, 영이, 영이…' 그 글자들 사이로 어린 딸을 향한 한 남자의 뜨겁고도 집요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영이 엄마는 뒷목이 땅겼다.
"공부 가르치랬더니 연애를 가르쳐?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영이 엄마는 곧장 K의 엄마에게 달려가 노트를 들이밀며 따져 물었다. 하지만 이웃사촌이자 절친했던 K의 엄마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네 살 차이가 뭐 어때서! 딸내미 평생 치마폭에 싸고 살 거야? 좀 좋아하면 어때서 그래? 혈기 왕성한 젊은 총각이 예쁜 처녀 좋아할 수도 있지!"
"그 집 아들은 대학생이라 미팅도 하고 밖에서 사람도 만나봤을 거 아냐! 우리 딸은 남자라곤 제 아버지밖에 모르는 순진한 애라고!"
"공부 가르치랬더니 연애를 가르쳐?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영이 엄마는 곧장 K의 엄마에게 달려가 노트를 들이밀며 따져 물었다. 하지만 이웃사촌이자 절친했던 K의 엄마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네 살 차이가 뭐 어때서! 딸내미 평생 치마폭에 싸고 살 거야? 좀 좋아하면 어때서 그래? 혈기 왕성한 젊은 총각이 예쁜 처녀 좋아할 수도 있지!"
"그 집 아들은 대학생이라 미팅도 하고 밖에서 사람도 만나봤을 거 아냐! 우리 딸은 남자라곤 제 아버지밖에 모르는 순진한 애라고!"
"과외해달라고 사정사정해서 해줬더니 이제 와서 생사람을 잡네! 우리 아들이 애를 건드렸어, 뭘 했어?"
"이건 손끝 하나 건드린 것보다 더 기분 나빠!"
두 엄마의 고성은 담장을 넘어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친자매처럼 지내던 우정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됐어! 과외 때려치워!"
"나도 됐어! 이제 고스톱 칠 때 우리 집에 오지도 마!"
"안 가, 안 가! 안 쳐!"
그날 이후, 영이와 K는 서로의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남남이 되었다. K는 쫓겨나듯 입대 영장을 받아 군대로 떠났고, 영이는 그렇게 첫사랑인지 짝사랑인지 모를 감정을 가슴 한구석에 묻어야만 했다.
한때 가족보다 가까웠던 두 집안은 아이들의 감정 문제로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었다. 비좁은 동네에서 마주치는 것조차 껄끄러워진 K네 집은 결국 서둘러 이사를 떠났고, K는 도망치듯, 혹은 쫓겨나듯 입대 영장을 받아 들었다.
입대를 며칠 앞둔 어느 날, K는 마지막 용기를 내어 영이의 집 대문 앞을 찾았다. 차마 영이를 직접 부르지 못하고 서성이는 그를 맞이한 건, 뜻밖에도 영이의 엄마였다.
“영이는 불러줄 수 없어. 너 군대 간다며?”
서슬 퍼렇던 기세는 조금 가라앉았지만, 영이 엄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너희 엄마는 다신 안 볼 것처럼 화를 내더니, 또 전화를 해서는 ‘미안해, 우리 아들 군대 가’ 하며 울먹이더라. 아줌마가 그날 너무 모질게 해서 미안해. 너도 나중에 딸 낳아보면 이 마음 알 거야. 그동안 영이 잘 가르쳐줘서 고마웠다. 군대 잘 다녀오렴. 제대하면 영이도 대학생이 되어 있겠네. 그때 다시 정식으로 만나. 예쁘게 만나, 알았지?”
그것은 허락인 동시에 약속이었다. K는 영이 엄마의 따뜻한 배웅을 마음에 품고, 3년 뒤 영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당당히 다시 나타나리라 다짐하며 훈련소로 향했다.
시간은 흘러 K는 제대했고, 군복을 벗자마자 가장 먼저 영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3년을 기다려온 재회였다. 들뜬 마음으로 대문을 두드리자, 예전엔 아장아장 걷던 영이의 막내 동생이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세요?”
“아, 막둥이구나! 많이 컸네! 아주 아기일 때 봤는데. 누나, 큰누나 어디 갔어?”
K의 물음에 막둥이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누나? 우리 누나 농구 형아 만나러 갔는데!”
“농구 형아……?”
“응! 우리 누나, 그 농구선수 형아랑 결혼할 거래요!”
K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영이 엄마가 했던 ‘나중에 대학생 되면 예쁘게 만나라’ 던 약속은, 군대라는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제대만 하면 당연히 자신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열일곱 살의 영이는, 이제 누군가의 아내가 되려 하고 있었다.
K가 대문 앞에서 막둥이와 멍하니 서 있을 때, 안채에서 영이 엄마가 걸어 나왔다. K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스쳤지만, 이내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어머, K구나. 벌써 제대했니? 아…… 네 엄마한테 이야기 못 들었나 보구나. 우리 영이, 곧 시집간다.”
K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영이 엄마는 쐐기를 박듯 말을 이어갔다.
“너도 알 거야, 요즘 워낙 이기니까. 대학 농구선수 OOO 알지? 그 친구랑 결혼할 것 같아. 영이 만나러 온 모양인데……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네? 농구선수요? 어머니, 저랑 한 약속은요……. 제대하면 예쁘게 만나라고 하셨잖아요!”
K의 목소리가 떨리다 못해 울음 섞인 비명으로 변했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오직 그 약속 하나로 버텨온 그였다. 하지만 영이 엄마는 단호했다.
“사내자식이 왜 울고 그래! 세상에 여자가 영이뿐이니? 너처럼 잘생기고 똑똑한 놈은 금방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어!”
“어머니, 저는 영이 말고는…… 단 한 번도 누구를 생각한 적 없어요.”
K가 간절하게 매달렸지만, 영이 엄마는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어쩌나! 이미 저 둘은 서로 좋아 죽는데. 너희는 인연이 아닌 거야. 그만 돌아가라.”
설레는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던 영이의 집 앞에서, K는 영이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쫓겨나듯 돌아서야 했다. 그날 이후 K의 세상은 멈춰버렸다. 그는 복수라도 하듯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여자는커녕 친구들도 멀리한 채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K는 대학을 졸업하고 철도청에 입사했다. 번듯한 직장에 외모까지 출중한 아들이었지만, 서른이 다 되도록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아들을 보며 K의 부모는 속이 타들어 갔다.
매주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 나가는 선자리는 K에게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서른을 넘기면 노총각 취급을 받던 시절, 부모님은 아침저녁으로 장가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를 몰아세웠다. K는 늘 마지못해 자리에 나가 영혼 없는 눈빛으로 시간만 때우다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나간 선자리에서 만난 여자는 확실히 달랐다. 당당하고 당돌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흘렀다. 첫인상부터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커피를 주문하지 않았다.
“전 주스 주세요.”
직원을 향해 짧게 주문을 마친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K를 빤히 쳐다보더니 폭탄 같은 한마디를 내던졌다.
“저, 임신했어요.”
커피를 마시던 K는 사레가 들려 켁켁대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라고요?”
“아, 놀라지 마세요. 당연히 그쪽 애는 아니니까.”
“당…… 당연하죠! 우린 오늘 처음 만났잖아요!”
K가 황당함에 말을 더듬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네? 뭘 말입니까?”
“이 아가의 … 아빠가 되어주세요.”
K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농담을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 저도 도와드릴게요.”
“도대체 뭘 돕겠다는 겁니까?”
영이를 잃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K에게, 이 당돌한 여자의 제안은 비극의 서막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도피처였을까. K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위험한 거래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주 화요일에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