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연애 5

기차역 5

by 미뇽작가

무례함을 넘어도 한참 넘어 기이했다.

영이는 어딘지 모르게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어 짐짓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무슨 사이냐니? 진희 너, 사촌 오빠라고 너한테 허락이라도 맡고 사귀어야 하니?”


영이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진희의 얼굴은 조금도 펴지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더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둘이…… 잤어?”

“뭐? 진희야, 너 왜 이래! 오빠가 네 남편이라도 돼?”


영이의 목소리가 커지자 진희가 머리를 감싸 쥐며 진저리를 쳤다.


“하…… 진짜 미치겠다. 내 남편은 아니지! 그런데…… 오빠 유부남이야. 너 정말 몰랐구나?”


순간 영이는 손에 든 커피잔을 놓칠 뻔했다. 뜨거운 액체가 출렁이며 손가락에 닿았지만, 그보다 더 뜨거운 충격이 심장을 때렸다. 시야가 핑 돌았다.


“자세히 말해봐.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말이야, 오빠의 조부모님 댁이자 우리 할머니 댁인 그 시골집 청소하려고 나도 기차역에 내렸었어. 그런데 건너편 승강장에 너희 둘이 손을 꼭 잡고 서 있더라? 너무 놀라서 얼른 건너와 너희를 따라 나도 기차에 탔어. 기차 칸을 뒤졌더니, 둘이 아주 깨가 쏟아지더구먼! 내 참 기가 차서!”



진희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둘이 꼭 끌어안고 잠들었길래, 내가 오빠만 따로 깨워서 끌고 다른 칸으로 갔어. 그리고 말했지!”


영이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오빠가 사라졌던 이유,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 그렇게나 다정했던 오빠의 손길이 한순간에 수수께끼처럼 풀리면서도 믿기지 않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기차 안, 단잠에 빠져 있던 K를 깨워 옆 칸으로 거칠게 끌고 간 진희의 눈에는 불이 나고 있었다.


“오빠 미쳤어? 쟤 영이 맞지? 둘이 할머니 집에서 자고 온 거야? 미쳤네, 정말 돌았어! 오빠 어쩌려고 이래? 새언니 지금 임신 중이잖아! 다음 달이면 아기 나온다며!”


날 선 폭로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K는 당혹스러운 듯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나직이 읊조렸다.


“조용히 해…….”

“왜! 쪽팔려? 창피해? 오빠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당장 헤어져. 안 그러면 지금 여기서 다 불어버릴 거야. 이 기차 안에서 둘 다 망신 줄 거라고!”


진희의 목소리가 격양될수록 K의 얼굴은 수치심과 고뇌로 얼룩졌다. 그는 애써 진희를 진정시키려 손을 내밀었지만, 진희는 차갑게 뿌리쳤다.


“그러지 마……. 진정해, 그런 거 아니야.”

“뭐가 그런 게 아니야! 둘이 손잡고 끌어안고 있는 거 내 눈으로 다 봤어! 후…… 당장 집으로 가! 안 그러면 내가 지금 당장 새언니한테 다 말할 거야!”


막다른 길에 다다른 K는 결국 고개를 떨구며 힘겹게 대답했다.


“알았어……. 시키는 대로 할게. 제발 부탁이야,

영이는 건드리지 마. 집에 가서 다 이야기하고……

이혼할 거야.”



그 말에 진희는 아연실색했다.

제정신이냐는 듯 오빠를 몰아세웠다.


“오빠 미쳤어? 도대체 왜 그래, 정말!”

“어차피 선봐서 조건 맞춰 결혼한 거잖아. 우리 사이에 별 애정 없는 거 너도 알잖아.”


K의 목소리엔 체념과 결연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은밀하고 치열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옆 칸에서 'K의 향기가 밴 목도리'를 두르고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을 영이를 생각하면, 이 모든 대화는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옆 칸에서 진희와 K가 처절한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에도, 영이는 세상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전날 밤, 마음을 다해 나누었던 대화의 여운이 꿈결처럼 달콤했기에 그 잠은 유독 더 깊고 아늑했다.


“미친 새끼! 그럴 거면 왜 임신은 시켰어?

새언니는 무슨 죄야!”


진희의 악에 받친 비난에도 K는 그저 힘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


“내가 다 정리할 거야. 넌 제발 모른 척해줘.”

“알았어. 당장 집으로 가. 새언니랑 다 정리되면 그때 나한테 연락해, 됐지? 영이는 집에 잘 가는지 내가 지켜볼 테니까, 오빠는 영이 눈에 띄지 않게 먼저 가버려.”



K는 결국 진희의 협박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진희는 K를 보낸 뒤, 플랫폼에 홀로 서서 하염없이 K를 기다리는 영이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한때 친구였던 영이를 향한 안쓰러움보다는, 가정을 파탄 낼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기막힘이 진희를 지배했다.


진희는 K와 했던 ‘모른 척하겠다’는 약속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영이에게 다가가 잔인할 만큼 날카로운 진실을 모조리 쏟아냈다.


진실을 마주한 영이는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목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던 K의 목도리를 거칠게 풀어헤쳐 손에 쥐었다. 그 속에 밴 K의 향기가 이제는 구역질 나는 악취처럼 느껴졌다. 영이는 차가운 대합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다.


“벌받았나 보네…….”


메마른 목소리가 영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남편 죽은 지 이제 몇 년이나 됐다고..

그런 여자가 무슨 사랑이야……. 흑흑, 바보 같은 년. 멍청한 년. 난 정말 바보 천치야. 나 같은 년이 무슨 행복을 바란다고…….”


영이는 자신을 향해 가혹한 채찍질을 퍼부었다. K의 배신보다 더 아픈 것은, 잠시나마 다시 ‘여자’로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핏덩이 같은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누렸던 그 하룻밤의 꿈이, 돌아온 현실에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낙인이 되어 영이의 가슴을 짓눌렀다.


서울역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로 영이의 통곡이 흩어졌다. 세상은 여전히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영이의 시린 겨울은 이제 막 진짜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한편.. K는 아내를 보자마자 이혼해달라고 하는데…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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