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연애 4

기차역 4

by 미뇽작가

코끝이 찡할 만큼 찬 바람이 부는 한겨울이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 대개 그렇듯, K와 영이는 서로의 외투 주머니 속에 맞잡은 손을 집어넣은 채 온기를 나누었다. K는 영이의 눈을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우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멀리 가보자.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영이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오늘이 아마 그날이겠구나.' 직감적인 설렘과 묘한 긴장감이 전신을 감돌았다.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며 눈이 시리도록 하얗게 덮인 깊은 시골 마을로 향했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헤치며 걷는 동안, 세상에는 오직 두 사람의 발자국만이 나란히 새겨질 뿐이었다.

그곳은 돌아가신 K의 조부모님이 사시던 옛집이었다. 지금은 비어 있지만, 가족들이 번갈아 내려와 관리하는 고요한 산골 집이었다.


어둠이 내린 빈집에 불을 밝히자 적막했던 공간에 생기가 돌았다. K가 마당 아궁이에 나무를 밀어 넣어 불을 지피면, 영이는 낯선 부엌살림을 뒤적여 소박한 저녁상을 차려냈다. 매캐한 연기와 구수한 밥 냄새가 섞인 그 집에서, 두 사람은 마치 세상의 눈을 피해 도망쳐온 어린 신혼부부처럼 달콤하고도 아련한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뜨끈하게 달궈진 아랫목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이불속에서 조심스레 손을 맞잡았다. 영이는 오빠의 숨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순간은 오지 않았다. K는 영이를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의아함이 서린 영이의 눈빛을 읽었을까. K가 영이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주며 입을 뗐다.


"영아, 우리 나중에 정말 결혼하게 되면… 그때 내가 너를 안아줄게. 지금은 아니야. 널 지켜주고 싶어."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눈동자는 눈밭처럼 맑았다. 아이를 키우며 '여자'보다는 '엄마'로 살아야 했던 영이에게, 자신의 욕망보다 그녀의 가치를 먼저 지켜주겠다는 그 말은 세상 어떤 고백보다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스물일곱,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영이를 세상은 결코 다정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교회에서도, 생계를 위해 나간 식당에서도 남자들은 사냥감을 쫓듯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처음엔 예의 바른 신사처럼 다가와 친절을 베풀다가도, 머지않아 본색을 드러내며 어떻게든 하룻밤 자보려는 노골적인 욕망에 영이는 진저리를 쳤다. 남자라는 존재,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에 영이는 깊은 환멸을 느끼며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세상 어디에도 나를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사랑해 줄 남자는 없겠지.'

그렇게 믿어왔던 영이에게 K는 기적 같은 존재였다. 그는 늘 조심스러웠고, 그녀를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보듯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단둘이 있는 이 외딴 시골 방에서조차 자신의 욕구보다 영이의 가치를 먼저 생각하며 "지켜주겠다"라고 말하는 남자. 그 흔한 불꽃보다 뜨거운 진심이 영이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내렸다.


두 사람은 아침이 밝아오는지도 모른 채 밤새도록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밤, 영이가 K에게 건넨 것은 몸이 아닌 오랫동안 꽁꽁 숨겨두었던 그녀의 '마음' 그 자체였다.


다음 날 아침, 시골집을 나와 다시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 밤새 내린 눈이 세상을 다시 한번 하얗게 지워버려, 길 위엔 오직 K와 영이의 발자국만이 나란히 새겨졌다.


“우와, 신기해! 정말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아!”


영이가 아이처럼 들떠 소리치자, K가 그녀의 손을 고쳐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하하, 정말 그렇네! 온 세상에 우리 둘만 있으면 정말 좋겠다, 그렇지? “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근심도,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 순백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행복이 절정에 달한 순간, 운명은 다시 한번 기차 소음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꼭 맞잡고 걷는 하얀 눈길은 아무리 걸어도 지루할 줄 몰랐다. 기적 소리조차 뜸한 외딴 시골 마을의 작은 기차역에는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겨울바람에 영이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자, K는 자신의 두 손을 호호 불어 그녀의 뺨을 감싸 녹여주었다. 그래도 부족했는지 그는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영이에게 정성스레 감싸주었다. 목도리를 타고 훅 끼쳐오는 K의 체온과 살랑이는 향기가 마치 자신을 온통 물들이는 것 같아, 영이는 수줍게 빙긋 웃음을 지었다.


밤새 긴 대화를 나누느라 눈을 붙이지 못한 탓일까. 따뜻한 온기가 도는 기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노곤함에 젖어들었다. 서로의 손을 꼭 쥔 채, 두 사람은 스르륵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차가 목적지인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영이는 부스스 눈을 떴다. 하지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맞잡고 있던 손의 온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K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영이가 두리번거리며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살폈다.


“어? 오빠가 어디 갔지?”


수많은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기차역에서 영이는 홀로 남겨졌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자리를 비운 걸까? 조금만 기다리면 오겠지.' 영이는 오빠를 놓칠세라 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지난밤 산골 집에서의 기억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대낮의 공기는 시리도록 차가웠고 영이는 철저히 혼자였다. 설렘으로 가득했던 마음 위로 차츰 불안한 안개가 내려앉았다. 기다림에 지쳐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영이를 불러 세웠다.


“영이야…….”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 옆, 기둥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한 여자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영이의 눈이 커졌다.


“영아, 나야 진희. 기억하지?”


진희였다. 고등학교 시절, 영이와 함께 K 오빠에게 과외를 받았던 동네 친구. 그리고 K 오빠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했던 아이.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나타난 뜻밖의 얼굴에 영이는 얼떨떨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어머, 진희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


“오랜만이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널 봤어. 잠깐 시간 있어? 우리 차 한잔할까?”


진희의 제안에 영이는 다시 한번 역사 안을 두리번거렸다. K 오빠가 자신을 찾으러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미련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물결 속에 오빠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고, 영이는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가자.”


역 근처의 작은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조용히 잔을 들었다. 밖에서 떨었던 탓인지, 뜨거운 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온기도 잠시, 찻잔을 내려놓는 진희의 손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적이 흐르던 테이블 위로, 진희가 갑자기 정색한 얼굴을 하며 입을 뗐다. 방금 전까지의 반가운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K 오빠랑…… 무슨 사이야?”


진희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질문은 날카로웠다. 영이는 들고 있던 잔을 멈춘 채 진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연한 재회라고 하기엔 진희의 눈빛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깊은 적의와 슬픔이 서려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매주 화, 목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