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연애 3

기차역 3

by 미뇽작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K 오빠의 목소리는 밤안개처럼 부드러웠다.

"나? 지금 야근하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나서…. 넌 예전보다 더 예뻐졌더라. 나는 뭐, 벌써 서른이 훌쩍 넘었지, 하하."


그의 쑥스러운 웃음소리에 영이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난 네 생각 종종 했어. 그날 역 창구에서 널 딱 마주쳤을 때,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아, 내가 너무 늦게 전화했지? 또 전화해도 될까? 이 시간이면 네가 직접 받는 거야? 그래, 알았어…."



그날 이후, K 오빠는 야근하는 저녁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여고생 시절 품었던 풋풋한 호감 때문이었을까. 고요한 밤, 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두런두런한 대화는 영이에게 작지만 확실한 위로가 되었다.


오빠는 예나 지금이나 지적이고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TV에 나오는 반듯한 아나운서를 볼 때마다 오빠의 얼굴이 겹쳐 보여 혼자 몰래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렇게 목소리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던 어느 날, 오빠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영아, 이번 주말엔 뭐 해? 우리… 얼굴 볼까?"



주말에 만난 두 사람은 여느 평범한 연인들처럼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캄캄한 영화관 안, 스크린의 불빛이 명멸하는 어둠 속에서 오빠는 슬며시 영이의 손을 잡았다.



설렘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이 불안함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영이의 마음은 깊어가는 밤처럼 다시 복잡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극장 안의 어둠 속에서 K 오빠는 영이의 손을 꽉 맞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날 정도로 놓지 않는 그 뜨거운 온기에도 영이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 아니, 불편함과 불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숨을 조였다.



‘나는 27살에 혼자가 된 과부라고, 친정집엔 눈에 밟히는 어린 남매가 있다고...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내내 영이의 머릿속엔 친정집에 맡겨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죄책감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심장을 찔러댔다.


어느덧 헤어질 시간, 학교 앞 자취방 골목에 다다랐다.

“잘 가, 연락할게.”



K 오빠가 나직하게 인사를 건네더니 갑자기 영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이어진 입맞춤.


손을 잡고 키스를 나누는 그 평범한 연인들의 행위가 영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결국 영이는 오빠의 품에 안긴 채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영이는 흐느끼며 고해성사를 하듯 진실을 쏟아냈다.

스물일곱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사연,

그리고 친정집에 맡겨 둔 핏덩이 같은 남매의 존재까지.

오빠는 뜻밖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놀라움도, 실망도 표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영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뿐이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영이의 어깨를 더 깊이, 더 따뜻하게 꼭 안아주었다. 그 침묵 섞인 포옹은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어 영이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평범한 연애를 이어갔다. 그의 변함없는 모습에 영이는 점점 마음을 열었고,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만큼 달콤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함께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이번엔 헤어짐이 아닌 함께 떠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