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꽃물

by 오늘핌

내겐 여러 명의 외사촌이 있는데,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큰 이모네를 제외한 사촌끼리는 한 살씩 차이가 나는 또래들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명절에는 물론이고 여름방학만 되면 할머니댁에 모여 남녀상관없이 봉숭아도 물들이고 가까운 계곡에 가서 물놀이도 하며 지냈다.


그리고 이따금씩 거의 열 살 넘게 나이차이가 나는 큰 언니가 놀러 오곤 했는데 나는 큰 언니가 온다고 하면 몇 번이나 엄마에게 '큰 언니 오늘 꼭 오는 거지?' 하며 확답을 받곤 했다.


수원의 한 대기업에서 일한다는 큰 언니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부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혼자 힘으로 서울 근처로 상경해 대기업에서 일하는 언니가 매우 멋있어 보였다.


엄마는 항상 큰언니가 어려서부터 예쁘고 끼가 많아서 기획사에서 가수 하라고, 배우 하라고 엄청 꼬드겼는데, 매부가 IMF때 실직을 해서 집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언니가 어린 나이에 돈을 벌겠다고 그런 기회도 포기하고 상고에 가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데, 이렇게 좋은 회사 들어가 잘 사니 얼마나 보기 좋냐면서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


정작 나는 엄마가 '돈만 있음 기획사 들어가서 지금 연예인 하며 떵떵거리며 살 텐데'하는 대목에서 그만 참지 못하고 '돈을 달라고 했어? 그러면 사기인데' 하며 항변했지만, 엄마는 눈을 흘기며 '그땐 다 그랬어'하며 입이 마르고 닳도록 언니 칭찬을 하는 바람에 괜히 무안해졌다.


그래도 언니는 눈코입이 서양 언니들처럼 큼지막하니 시원시원하게 생겼고 체격도 커서 어린 내가 보기에도 세련된 도시여자, 게다가 대기업에 다니는 커리어우먼으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큰언니가 가끔 여름휴가로 시간이 맞아 외가에 올 때면 나는 마치 흠모하는 짝사랑 상대가온 것처럼 마음이 몽글몽글해져 수줍었다.


어떤 여름에는 큰 언니가 예고 없이 놀러 와 마루에 모여 퍼지게 낮잠을 자던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까서 조용히 입에 물려주며 냉기로 단잠을 깨웠지만 곧 큰언니의 얼굴을 보고 까르르하며 좋아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서는 엄마와 큰언니의 주도하에 우리는 남녀 할 것 없이 나란히 화단에 쭈그려 앉아 엄마와 큰언니가 열심히 봉숭아 잎을 짓이기는 것을 구경했다.


붉게 흘러나오는 그 꽃잎을 우리 손톱에 척 올리고 나면 우리는 서로의 손톱이 발갛게 물드는 것을 구경했다. 그러고 나면 엄마와 큰 언니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서로의 손톱에 봉숭아 잎을 물들였다.


그렇게 우리 사촌들은 같은 색깔의 손톱물을 들이며 유년의 여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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