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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힌 Oct 10. 2021

#13 벼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멀리 여행을 떠났다. 조수석에 앉아 열심히 맛집을 검색했더니만 그만 멀미가 나버렸다. 손에 쥔 작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어내고 고개를 드니 아직 덜 익어 푸르딩딩한 벼가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속담이 하나 떠올랐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채 여물지도 않은 저 벼들은 바람에 쓸려 중력에 끌려 계속 고개를 숙이면서 겸손하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벼는 맛도 있고 예의 바르며 착한, 아주 좋은 식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착해야 한다. 목걸이를 하듯 오랜 시간 동안 내 마음에 걸고 다니는 말이다. 항상 누구에게나 착하고 싶었고 그들이 나를 착한 사람이라고 인지해주길 바랐다. 다행히 얼굴이 선한 인상이기도 했고 착하게 행동하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는 ‘착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었다. 이십 대 중후반까지는 사람들이 너는 착한 사람이라 말해주는 게 퍽 마음에 들었다. 실수를 하거나 상황이 안 좋을 지라도 그래도 착하니까 괜찮다 스스로 위안도 할 수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만큼 위로도 받을 수 있었기에, 면죄부를 얻은 것 마냥 착한 사람의 탈이 좋았다.     


 그런데 내 생각이 자랄수록 착함이 과연 좋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세상은 나에게 착한 건 바보 같다며 악해야 잘 산다고 지속적으로 속삭여 댔다. 심지어 미디어 속 악인들은 착해빠진 주인공보다 더 강렬하며 매력이 넘쳤다. 자신이 그 서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인공만을 응원하기보다 악당도 사랑하며 그들에게 이야기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 ‘다크 나이트’와 ‘조커’를 보고 나서, 히어로가 아닌 악당 조커에게 반해버렸다. 그는 가엾기도 하고 미쳐 보이기도 했으며 잔인하고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그 점이 지극히 인간적이게 보였다. 반면에 전형적인 영웅인 캡틴 아메리카는 싫어했다. 보고 있으면 인간미가 안 느껴진달까 영웅으로서 지극히 완벽하기에 답답하게 느껴졌다. 영웅이라기엔 뭔가의 모자람이 있던 아이언맨이나 데드풀을 더 애정 했다.     


 그래서일까. 이따금 착하기만 한 내가, 그런 내 이름 세 글자가 정이 안 갔다. 낯설고 껍데기처럼 나의 본체와 분리되어 가볍게 떠 있다고 느껴졌다.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며오자, 마음이 축축하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를 정의한다면 내 이름 석자보다는 모순(矛盾)이란 두 글자가 더 꼭 들어맞으리라. 착한 내가 나인가 악한 내가 나인가, 아니 착한 내가 나여야 하는 가 악한 내가 나여야 하는 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흑과 백으로 나뉠 수 없는 건데 자꾸 둘로 분리시키는 데다, 기왕이면 남의 눈에 좋아 보이고 당당할 수 있는 백색으로 나를 뒤집어엎고 싶었다. 흑(黑)인 나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무섭고 밉고 내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런데 책도 읽고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자라고 나를 보는 시선이 바뀌자 바닥에 깔려있던 스스로 측은해하는 마음도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모든 감정이 한데 모여들자 나는 영화를 보듯 조금 거리를 둔 채로 나라는 사람의 마음속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속엔 착한 캐릭터도 있고 나쁜 캐릭터도 있고 얄미운 캐릭터도 있고 게으른 캐릭터도 사랑스러운 캐릭터도 있었다. 보면 볼수록 숨어 있던 캐릭터들이 나왔고 새로운 캐릭터도 등장했다.      


아, 한 편의 영화에는 이렇게 다양한 캐릭터들이 있구나.

그렇지 이게 맞지.

어쩌면 내 안의 악당도 착하기만 한 주인공보다 매력적인 존재일지도 몰라.     


 이렇게 실컷 꿍얼대고 나니 진짜 착한 나도, 억지로 착하게 굴었던 나도, 일탈을 좋아하는 나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걸 해버렸던 나도 모두 다 나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커다란 안도의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러자 차창 밖에서 만난 바람에 따라 한들대던 벼처럼 가슴 한편이 살랑였다.


글 쓴 동생 - 율힌 yulhin

그림 그린 오빠 - 토마쓰리 Thomas Lee

잠시 그림 빌려준 새언니 - 전포롱 jeon polong








안녕하세요 율힌입니다.

오늘은 조금 늦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오후 1시인 지금 글로 먼저 인사드리게 되었어요.

제 글을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과

잠시 그림을 빌려주신 전포롱 작가님께

무한한 감사드립니다.

달이 뜨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토마쓰리 작가님의 그림과 함께

글을 감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

약속드린 시간보다 늦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음 주 일요일부터는 나른해지는 오후 3시에 찾아뵙겠습니다.

커피나 차와 함께 제 글도 곁들여 읽어주시기를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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