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둘 수 없듯이"

그밤 들려주신 하나님의 마음.

by 에스더



이른 밤,
두 아이와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종일 몸을 써서 놀았던 아이들은 눕는 순간, 바로 잠에 들었다.
짧고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채우자, 그제야 나는 남편을 떠 올렸다.


몸을 눕혔다고 해서 마음까지 쉬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도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열 시를 넘기는 밤은 대개 비슷한 결말을 향해 흘러갔다.
열의 여덟은 술에 취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고,
그 반복은 더 이상 사건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 이후의 밤은,
기다림이라기보다 마음의 준비에 가까웠다.


특별하게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날따라 유난히 마음을 무겁게 했다.


밤이 깊어 질 수록, 취했을 그를 맞이할 생각을 하니

감정은 분명한 사실 앞에 불안으로 먼저 반응했다.
억눌러 두었던 상심이 삶의 결을 따라 번지듯 올라와,
뜨겁고도 조용한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불만인 것일까.
왜 그는 거의 매일 술에 기대야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걸까.
술에 취해서라도, 아무 말 없이 잠자리에 드는 일은 그에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 걸까.'


그 질문들은 답을 얻기보다는 되풀이되는 현실 앞에서 스스로를 닳게 만들었다.


그가 끝내 귀가하지 않은 채 밤이 깊어지면,
두려움은 점점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막연했던 불안은 걱정으로 옮겨 가고, 그 걱정은 다시 몸의 반응으로 이어졌다.


밤이 깊고 집 안이 고요해질수록 오히려 긴장은 더 선명해졌다.
동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도 나는 과도하게 반응했고,예고 없는 소음 앞에서 깜짝 놀라곤 했다.


그 밤들은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가슴 졸임과 경계의 시간이 되어 갔다.


깊이 잠들지 못한 상태에서 신경은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 노이로제에 가까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나는 신앙심으로 견뎌 보려 애썼다.
기도하며 마음을 다잡고, 상황을 말씀으로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선택이자 감당 해야할 과제일 뿐이었다.


문득, 같은 환경 안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다른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이 모든 시간을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과연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일까.


안하무인에 가까운 취중의 언행을 보고, 듣고, 때로는 직접 겪으며
성장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엄마로서의 마음 한구석은 늘 아리고 또 아팠다.


그 아픔은 감정이라기보다, 외면할 수 없는 책임에 가까웠다.




남편의 구원 문제는 어느새 가장 절박한 기도 제목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삶까지 걸려 있다는 인식 앞에서, 그 문제는 늘 기도의 중심을 차지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이 한 사람에 머무르지 않고 은혜로운 '영적 유산'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십계명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그 기도는 늘 애타는 간절함이 되었다.


그러나 기도를 거듭할수록 마음이 가벼워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강하게 맞서는 어떤 기세를 느끼게 되었다.
마치 믿음의 방향을 틀어 놓으려는 듯, 보이지 않는 저항이 강력하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신앙의 흐름을 방해하려는 거칠고 집요한 기운 앞에서 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충돌 한가운데 서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버텨내고자 하는 믿음을, 보이지 않는 세력은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삶의 사소한 국면마다 집요하게 균형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은 우연이라기보다 의도를 가진 압박처럼

느껴졌다.


이 싸움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면, 결코 패배할 수 없다는 각오로 어린 신앙이었지만

승리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견뎌 내고 있었다.


믿음은 도피가 아니라, 이 현실을 통과하기 위한 유일한 힘이자 의지였다.


그러나 취중 여과없는 말과, 때로는 실제적인 폭행으로까지 지속되는 환경은
영적인 결단만으로 감당하기에는 한편으론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럴 때마다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이 싸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때로는 차라리 천국으로 속히 가고 싶다는 마음도 간절했다.




엄마의 깊은 상심은 알지 못한 채,곁에서 천진난만하게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아이들이 그날따라 유난히 더 측은해 보였다.


아이들인들 되어질 일을 모르리.


깊은 밤, 술 취한 아빠에 의해
아이들은 반드시 잠에서 깨워질 것이고,
그 이후의 시간은 길고 고단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연약한 엄마를 의지한채 아무런 경계도 없이 고른 숨을 내쉬는 그 얼굴들이
이 밤의 현실과 너무도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가족을 조금 더 사랑하고, 서로를 아껴 주며 살 수는 없는 걸까.
소란이 아닌 대화로, 불안이 아닌 온기로
오손도손 화목하게 살아갈 수는 정말 없는 일일까.’


그 질문들은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이 삶의 방향 자체를 또 다시 묻게 하고 있었다.


가슴에서 솟는 뜨거운 눈물이

다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참아 보려 할수록 감정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고,
상심으로 가득 찬 마음은 더 이상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한 채 아픔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굳은 결단 앞에 선 사람처럼 단호한 마음으로 호소하듯 간청했다.
이것은 간구라기보다, 벗어 날 수 없는 현실 앞에 마음이 꺼내 놓은 솔직한 고백에 가까웠다.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이유도 없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아낸다는 것이 이제는 너무 벅찹니다.


이 환경이 더 이상 달라질 수 없다면, 차라리 제 영혼을 거두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어린것들을 이 죄악된 세상에 남겨 둘 수 없사오니,

저와 아이들, 우리 세사람의 영혼을 함께 불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지난 날

죽음 앞에 섰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하며 붙들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자유한 하늘나라로 불러 주시기를 바랐다는 고백은
삶을 포기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이 불안의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에 가까웠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고백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순간 뇌리를 스치듯 하나의 말씀이 들려왔다.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그 말씀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적 논리가 담겨 있었다.


"네가 두 자녀도 사랑하기에 이 죄악 된 세상에 버려 둘 수 없듯이,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이 다 내 사랑하는 자녀라.ㅡ"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숨이 멎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오… 아버지.’


눈물에 젖은, 깊게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말씀이 반복해서 마음속을 지나가는 동안,
나는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마치 잃어버린 중요한 열쇠를 발견한 것처럼 깨닫게 되었다.




"버려 둘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존재론적 필연성을 드러내시고 계셨다.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버릴 수 없는 분.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고백과 맞닿아 있는,
세대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설명이었다.


아니,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그 사랑 때문에 아들을 포기하신 분이셨다.


"이처럼 사랑하사"는 하나님의 죽음의 각오이고 "버려둘 수 없듯이" 는 하나님의 포기 불가능성이심을 깨닫게 하셨다.




차라리 하늘나라로 가고 싶었던 마음이, 그 순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떠나고 싶었던 마음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명으로, 견디고 싶지 않았던 삶은 전해야 할

삶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분명한 부르심이었다.


가장 절실했던 모성애의 마음을 비추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부성애 또한 다르지 않음을 일러 주고 계셨다.


그 순간,
나의 모성은 더 이상 나만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이끄는 통로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향해 품고 있던 애틋함과,이 세상에 남겨 두고 싶지 않았던 안타까운 마음을 통해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 사랑은 설명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존재하던 감정 위에 겹쳐지는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세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사실,

그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생명처럼 내 가슴으로 흐르고 있었다.




로뎀 나무 아래 쓰러진 채
차라리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 의 모습이 그 순간 나의 상태와 겹쳐 보였다.
순간적으로 세상을 내려놓고 싶었던 그 연약한 마음 위에,
하나님은 그때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다가오고 계셨다.


책망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힘을 회복하게 하는 말씀의 떡으로.

지쳐 있던 마음을 일으켜 세우시는 인애하신 손길로 다독이셨다.


그분은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고, 억지로 다그치지도 않으셨다.
대신 방향을 바꾸어 주셨다.

떠나고 싶었던 마음을 전해야 할 마음으로, 살아내기 버거웠던 현실을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비전으로 전환시키셨다.


그 밤 나는 다시금 깨닫는 은혜안에 있었다.


그 은혜는

이 싸움에서 물러나라는 부르심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복음을 붙들라는 요청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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