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4절을.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아이들을 잠자리에 들였다.
남편의 식사를 정돈해 식탁 위에 올려두고
짧은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철야 예배를 향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지난주
혹 남편이 술에 취한 채 찾아왔는지,
그날 밤 교회 입구에는
깨진 술병이 흩어져 있었고,
술 냄새는 예배당 앞 공기 속에
가시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걱정이 앞섰지만
그렇다고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예배의 자리를
함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다짐이
의지처럼
나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즘에서
혹 반문될 수 있는
가정이 먼저이고 중요하다는 말,
그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삶의 대부분은
가정을 중심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늘 말씀에 비추어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앞에서도
나는 침묵으로 그를 섬겼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예배의 자리에 대해서 만큼은
끝내 물러설 수 없었다.
물론 내 의지대로 순조롭지만은 않았지만,
흔들림이 커질수록
그 선택은 오히려 더 분명해졌고,
그 분명함이 삶 속에서 실현되어질 때마다
힘겨운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은
눈앞에 놓인 여러 상황을
범사에 감사로
버텨 낼 수 있게 하는 힘이자 위로였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서 있었다.
고심 끝에 본 교회가 아닌,
집에서 가까운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본당이 아닌 교육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어둠 속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본당에서 울려 퍼지는 은혜로운 찬양 소리가
벽 너머로 전해져 왔다.
그 찬양 소리는
마치 천국에서 들려오는 듯한 평안한 온기가 서려 있는 듯 했다.
그 평안은 마음 가득 부러움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함이
간절한 아쉬움으로
마음 한편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찬양소리에 귀 기울이며 기도하고 있자니
가슴이 문득 막혀 왔다.
나는 조용히 묻고 있었다.
“아버지,
나는 저 예배의 자리로
갈 수 없는 건가요.
맘껏 함께 찬양하고,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있고 싶은데..,
왜 이 어두운 곳에서
혼자 몸을 숨긴 채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건가요.”
안타까움이 서러움이 되니
참으려 억누르던
부러움과 서글픔이 뒤섞인 감정이
뜨거운 눈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있을 때
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남편의 살짝 저는 걸음의 보폭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누어
긴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였다.
두려움과 긴장이 한꺼번에 몰려와
숨을 고르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이내 문이 열렸다.
그는 실내의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했다.
수축된 긴장이
심장 박동까지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듯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그 자리를 떠났다.
긴 밤,
눈물과 숨이 뒤섞인 기도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참아 두었던
묵은 감정들까지
하나둘 불려 나왔다.
왜 늘 살얼음 위에 선 듯한 환경 속에서
하루를 건너야만 하는지,
이 불안과 두려움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왜
홀로 된 어둠 속에서
기도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절절히 반복되었다.
감히 따지듯 여쭙다 보니
조목 조목 많고도 길었다.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귀가 하려 했던 마음은
그가 잠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으로 바뀌었고,
기도는 그렇게
밤의 길이를 따라 이어졌다.
새벽녘,
잠들어 있는 남편을 깨우지 않기 위해
방 한쪽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펴고 누웠다.
잠시 눈을 붙인 그 시간,
꿈속에서 성경 한 권이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펼쳐 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책장을 넘기자,
궁서체로 위에서 아래로 기록되어진
한 문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에스더야.
너는 요한복음 1장 14절을
읽어 보았느냐.”
그 문장을 읽은 순간
눈이 떠졌다.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성경을 집어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혼자 숨어 가슴을 치고 있던 내 곁에
조용히 함께하셨음을 일러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네가 혼자라고 느끼는 그 인식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말씀으로.
“나는 네가 서 있는 그 자리까지
이미 내려와 있었다”는
존재 자체로 건네신 위로였다.
하나님은 나의 서글픈 고독을
곧 사라질 감정으로 취급하지 않으셨다.
그 밤의 아픔을 붙드셔서
삶을 해석하는
깊은 신학의 자리로 옮겨 놓으셨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가장 깊은 선언으로 마음을 다독이셨다.
주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시고
인류의 구속을 이루기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을 보여 주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밖에서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래서 성육신은
하나님의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은
빛나는 외형이나
초월적 위엄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가는 순종,
아버지를 끝까지 드러내는 삶,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 속에서
나타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 역시
가볍지 않았다.
은혜는,
감정적 친절이나
일시적인 동정이 아니라,
떠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이며,
진리는,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인간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빛이라고.
중요한 것은
은혜만도, 진리만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진리만 있으면 정죄가 되고,
은혜만 있으면 값싼 위로가 될 수 있기에,
예수님 안에서는
진리가 인간을 직면하게 하고
은혜가 그 자리에 함께 머무는 것,
그 둘이 완전하게 함께 존재하는 상태를
‘충만’이라 부른다는 설명이었다.
즉
요한복음 1장 14절은
하나님이 설명으로 자신을 알리신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직접 만나신 분이라는 증언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은
초월이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서 떠나지 않는 사랑으로 나타났고,
구원은
진리를 숨겨 주는 은혜가 아니라
진리를 통과하게 하되
혼자 두지 않는 은혜라는 것을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예배는 조심스러웠고,
긴장은 쉽게 가시지 않는 현실이었고
삶의 조건이 갑자기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그 밤,
홀로 외롭게 기도하게 두시느냐고
그렇게 직고하던 마음과,
눈물에 젖은 애달음,
찬양을 가슴으로만 삼켜야 했던
그 아픔까지도 느끼시며,
그 밤
그 자리에
이미 장막을 치고
은혜와 진리로 함께 계셨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께서
구원을 위해
인간의 시간과 고통의 자리로
친히 들어오신
그 가장 급진적인 사랑을
조금씩 일러 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그렇게
처한 문제를 감사로 이겨 낼 수 있도록
말씀이신 당신을 보여 주시며
친히 동행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