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제와 장류진의 소설을 읽고
1. MZ와 mz, 알고리즘의 안과 밖의 존재들
디지털 세계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물질적 혹은 비물질적인 케이블의 도움으로 선택된 하나의 관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너’와 ‘나’는 이제 미디어 복합체 속에 존재하는 회로판의 한 요소로서 네트워크에 속한 존재이다. 인간이란 더 이상 데이터들의 주인이 아니라 생성된 데이터들의 피드백 과정에 이식된 하나의 회로판과 같은 존재이다. ‘나’는 커뮤니케이션의 실타래들이 얽히고설켜 망을 이루는 그곳에서 형성되고 부양된다. 바로 그곳에서 탄생하고 양육된 0과 1의 존재들은 ‘정보값’ 있음과 없음으로 구별 지어진다. 그들을 각각 MZ 혹은 mz라고 명명되며, ‘플랫폼 자본주의’ 한복판에서 알고리즘에 의해 불려 나오거나, 어쩌면 그 바깥에서 서성거린다.
2020년대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겨우 한자리에 안착한 인물들의 알고리즘 안에서 분투하는 ‘생존’ 작전과 그 바깥에서 떠내려가는 도중에 있는 인물들의 조각난 ‘생존’이 있다. 우리 문학의 장에서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던 ‘생존’의 키워드가 전면적으로 등장한 것은 87년 외환위기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현실과 맞물려 있다. 80년대 혁명과 노동의 문학에서 90년대 이후 개인의 내면의 귀를 기울였던 시대까지 문학과 문화 영역을 점유했던 것은 ‘진성성의 에토스’라고 할 수 있다. 생존이 부끄러움이 되는 감수성, 진정성만이 옳은 삶의 기준으로 공유되고 통용되는 시간이 우리에게 있었다. 그러나 생존을 증오하던 저 불편한 진정성이 97년 외환위기 이후 와해된 자리에 재테크와 자기 계발이 들어서면서 바야흐로 신자유주의적인 성공과 치부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그 이후 한국 사회의 슬로건인 ‘부자 되세요’는 20년이 지난 이즈음에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p.43)라는 덕담으로 변형 유통되며 현실의 문제에서 여전히 가장 유력한 화두로 작동하고 있다. 한편 2000년대 이후 발표되어 문단과 독자로부터 굳건한 지지와 호응을 얻고 있는 작품들이 공히 다루고 있는 주제야말로 진정성과 관련 있음 직한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지워진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는 방식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새로운 역사 윤리를 창안하기도 하며, 젠더와 소수자의 삶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며 연대와 위로의 힘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포스트-진정성’ 시대 이후 다시 우리 공동체는 ‘진정성’의 윤리가 필요한 시간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그 화두는 지금 여기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한다.
그런 와중에 2020년대 들어서기 무섭게 이질적인 두 가지 풍경이 우리 앞에 들이닥친다. 소위 ‘진정성’에는 관심이 ‘1’도 없어 보이는, ‘회사’ 안팎의 사람들, 서이제의 ‘0’과 장류진의 ‘일(事)’의 존재들이 그들이다. 정이현 소설가는 “정확한 시간에 여기 도착”한 소설로서 우리가 “이 시공간을 건너기 위해 기다려온” 소설이라며 장류진 소설에 대한 격한 환영 인사를 전한다. 이광호 평론가는 “포스트 진실의 시대에 가장 먼저 도착한 0%의 미래”이며, 이 미래는 “동시대의 감각으로 지금 시작하는 미래”라는 표현으로 서이제의 소설을 환대한다. 그리하여 이 두 작가는 현재 또는 미래의 이름으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다.
장류진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은 어디선가 만난 듯한 성격의 인물과 본 적 있는 풍경이 ‘뜻밖의’ 신선함으로 등장한다. 굳이 반-시대적, 반-역사적 인물이라는 수사조차 무거운 그들의 관심은 시대와 역사라는 거대한 영역에까지 못(안) 미친다. 오히려 그들은 시대 영합적인 방식으로 ‘회사’와 공생한다. 인물들은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207) 같은 것이 주는 따뜻함과 푹신함을 ‘추구’한다. 게다가 그들의 평범성은 평면적이기도 해서 소설의 전개 과정 속에서 어떤 계기에 의한 각성도 변신도 특별히 도모하지 않는다. 지금 주어진 구조 속에서 각자의 최선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제까지의 통상적인 소설의 주인공으로서는 오히려 낯설다. 그들은 평범한 가운데서도 어떤 극적인 인생을 사는 주인공의 대조군 혹은 보조적 위치에서 등장할 법한 그저 그런 인물일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결격에 해당하는 다소 높은 ‘정상성’은 오히려 소설의 신선함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들의 공유된 불안과 불균형은 유쾌하거나 가벼운 이야깃거리가 되면서 일상보다 더 넘쳐흐르지 않게 작가에 의해 적절히 조절되고 있다. 특별한 미담도 악행도 없는 평범한 회사원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각자들 한번 ‘잘 살아보겠다’는 때맞춰 도착한 MZ들의 “똘똘한” 선언이 있다.
서이제의 『0%를 향하여』에서는 ‘0’으로 수렴될 존재들, 사회의 어떤 통계에도 잡히지 않을 알고리즘 밖의 존재들이 그의 낯선 문체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들 역시 ‘사건적’ 인물로서는 미달할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며 살아온” 독립영화감독(지망생)은 자기가 되고 싶은 좋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 “일단 종로3가역 1번 출구 앞에 멈춰”(p.39) 선다. 서이제의 이야기 속에서 과연 ‘좋은 사람’은 누굴까, 있기나 한 걸까, 우리도 서이제의 소설 앞에 일단 멈춰 선다.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은 얼핏 짐승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고,” “설령 내가 지금 짐승이 되어갈지언정 이것 또한 한때에 불과”(p.133)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짐승이 되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mz’들의 ‘한때’의 이야기이다. 바깥의 사람들의 꿈과 사랑 그리고 좌절과 불안이 삶을 어떻게 점유하고 어떻게 조각내는지를 서이제 스타일은 무-질서한 배치와 번복과 반복의 기법을 통해 노출시킨다. 마치 콘크리트 노출 기법으로 디자인된 카페에서 독서를 하고 있는 듯 거친 질감이 그대로 서걱인다. 그러므로 서이제의 서사 전략은 ‘먼저 도착한 미래’처럼 낯설다.
2. 테크노벨리의 기쁨과 슬픔
25,000(축의금 대신 먹은 밥값)-13,000(내가 청첩장 주면서 산 밥값)=12,000
장류진의 ‘회사인’들은 사회(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구조가 어떤 곳인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대학에서 스펙을 쌓을 때부터, 취준생으로 수천 장의 이력서를 날릴 때부터, 마침내 정규직으로 입사할 때부터 다 ‘계산’이 서 있었던 일이다. ‘만이천 원을 내면 만이천 원의 축하’를 받아야 한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나보다 스펙이 달리는 남자 입사 동기가 “정확히 천삼십만 원 차이”가 “딱 천삼십만 원어치만큼”(p.27) ‘일’을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회장의 한마디로 “월급이 고스란히 포인트로 적립”되는 반 년짜리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도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사고구조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p.50)은 경험으로 알고 있는 직장인의 리빙포인트이다. 이들 직장인에게 자신이 뒤집어쓴 ‘굴욕감’과 ‘수치심’을 오래 품는 것은 아무것도 달라지게 하지 않는다.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사칙연산으로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 더 요긴하다. 직원 아이디를 이용해 포인트로 물건을 싸게 구입하고 업무 시간을 이용해 직거래하면서 개인적인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포인트와 함께 굴욕감을 처분하고 있는 중이며,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일’의 코드를 뽑아두면 될 일이다. 그들은 일 밖으로 나가는 순간 아름다운 것만 볼 것이다. ‘거북이’와 ‘레고 스타워즈 시리즈’와 여름 이탈리아 여행 계획 그리고 ‘조성진 홍콩 리사이틀 티켓’은 과연 그 모든 것들과 맞바꿀만한 것이 된다. “자기가 짠 코드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만 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다. 장류진의 ‘회사인’들은 회사에 목숨을 걸고 뼈를 묻을 생각은 없지만, 회사 구조에 복종하고 순응한다. 그들의 스펙과 이력서들과 야근은 ‘아름다운 것’들과 교환하기 위한 티켓값이다. 물론 그들의 ‘일’이 만들어 내는 ‘생산물’, 예를 들면 코드라든지, 앱이라든지, 공연 기획이라든지 하는 보람 정도를 보너스로 챙길 수도 있다. 이 소설집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보이는 “4등급, 다소 낮음”(p.126)형의 인간 장우 역시 자신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2등급쯤’ 되는 회사인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수단의 불편함을 어떤 방식으로 계산하느냐의 차이가 그들의 등급을 가른다. 장우는 “조회수 1,013,574, 좋아요 11만”(p.115)의 냉장고송의 가치보다 1집 음원의 27,149번 재생 횟수와 저작권료 삼만 원을 크다고 생각하는 계산법을 가지고 있다. 두 달 치의 레슨비로 밀린 전기요금 대신 동물병원 쇼윈도 너머의 보리를 데려온다. 제정신이 아닌 계산법이다. 마지막 남은 음원 저작권료 삼만 원은 보리의 눈을 감게 해주는 비용으로 지불한다. 장우의 “타이밍”(p.122)은 언제나 어긋난다. 그러므로 장우는 회사인에 비해 다소 낮음, 효율 4등급의 인간이다.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기쁨’에서 ‘일’의 슬픔을 빼고도 ‘일’의 보람이라는 것이 나머지로 남는 장사. 장류진의 ‘MZ’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계산에 매우 능숙하다.
장류진의 소설 전반에 걸쳐져 있는 ‘일’의 개념을 ‘노동’과 연관하여 역사 문화적 개념의 유구한 의미 변화를 추적하는 일은 이 글에서 의미가 없다. 다만 장류진의 ‘일’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에 분명하지만, ‘일’은 ‘일’일 뿐이라는 냉담한 거리 또한 알아채야 한다. 일이 내 삶의 어떤 영역을 크게 좌우하지만, 그것은 경제적으로 교환됨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취업함’과 직결되고, 그것은 일단 ‘정상적인’ 시민사회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일’은 자신의 시간과 노동 능력을 팔아 돈(월급)을 사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들이 혹시라도 자아, 인간의 존엄, 실존적 가치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월급으로 살 수 있는 거북이, 레고, 여행 등을 통해서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류진의 소설에 등장하는 직장인들은 회사에 있을 때는 노동하는 인간으로 존재하지만, 회사 밖에서는 유희하는 인간에 가깝다. 물론 이 호모 루덴스는 ‘일’을 해야지 누릴 수 있는 정체성이다. 그들은 ‘일’과 관련된 계산기와 유희와 관련된 계산기 두 대를 가지고 있다. “TAKE OUT 시 아메리카노 2000원. 마실까, 말까.”(p.158)하는 출근길의 고민과 이태리 사람들이 진짜 뜨거운 커피만 마시는지 보기 위해서 내년 여름에 이탈리아 여행 갈 계획을 짜는 계산기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연차를 하루 붙여 삼박사일을 놀기 위한 홍콩행 왕복 티켓이 “조금 비싼가 싶었지만 오늘은 월급날이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했다.” (p.63) ‘일’에만 얽매여 구질구질하게 살지만은 않겠다는 것이다. 장류진은 이런 MZ의 ‘마인드’를 직관적으로 읽어내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SF영화에서 본 비정한 우주도시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테크노벨리에도 겨울이 지나면 물이 흐르고, 봄이 오고, 벚꽃이 예쁘게 피고, 또 여름이 올 것이다.
장류진에게서 문학으로서 글쓰기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촉발시킨다는 것이 대단히 거창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삶, 나의 직장 생활이 그리 불행하지 않다는 것, 나의 처세와 버팀이 비굴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작품을 통해 확인받는 순간 내 삶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는 긍정적으로 갱신될 수 있다. 다른 삶을 창안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잘살고 있다는 안심, 그런 명랑한 기대감들이 장류진을 읽게 하고 장류진을 또 쓰게 할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내 삶에 대한 긍정과 격려를 제각각의 방식으로 ‘득템’했을 것이다. 그것이 장류진 소설이 가진 힘이자 미덕이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획득된 현장감과, 상황과 내면에 대해 센스 있게 포착할 수 있는 작가적 기질은 장류진 글쓰기의 최대 강점이자 미덕이다.
3. ‘진실’의 ‘정보값없음’
서이제의 ‘믿을 수 없는’ 문체는 시간과 공간의 중력에서 해방된 언어를 통해 인물 내면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면서 독자까지 감염시킨다. “희미한 안갯속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p. 225)로 가득한 공간에서 모두가 길을 잃는다.
인물들은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금 여기에 없는 비-존재들이기도 하다. 「미신(迷信)」의 시간은 흩어지고 뒤집히면서 무한히 증식한다. 우리는 고작 몇몇의 단어, 저수지, 선생님, 이 군, 자살, 10년 등의 키워드로 서사를 꿰어 맞추려 애를 쓴다. 서술자의 정체는 처음부터 의심스럽기만 하다. 이 난해한 소설 「미신(迷信)」의 열쇳말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흩어놓은 시간을 재정립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열쇠는 아무것도 열어 보이지 못한다. 비워진 스도쿠의 빈칸을 열심히 채워 보지만 그 전체는 이미 전체가 아니다. 계속 불어나는 의심은 반복되는 ‘모른다’에 있다.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넘어서는 스스로 믿지 못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어떤 생성이나 진실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편화되어 있으며 그 전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완성, 꿰맨 자국, 기워댄 천 조각”들로 파편화된 채로 그대로 노출된다.
숨이 넘어가는 찰나, 얼음, 깨지고, 우리는 물속에 잠긴다. 그러나 우리는 물속에 잠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군, 그는 내가 늦을 때마다 아무런 말 없이 나를 기다려주었던 유일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그곳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겨우 살아가기 위해서 비극을 믿어야겠지요. 살기 위해서 믿기 힘든 일을 믿을 수밖에 없네요. (...) 이제는 그것도 착각이 아니라고 믿어야겠지요. (...) 10년이 지나자 모든 일이 씻은 듯 괜찮아졌다는 그 말을 꼭 믿고 싶어요.
서이제의 흐르지 않고 쌓이는 시간은 서사 과정의 전체화를 막고, 진실 없음을 누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는다. ‘모른다’는 사실을 ‘믿는다’ 것만이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에서 가장 믿음직해 보인다. 그러나 ‘믿다’의 동사 어간 ‘믿-’의 반복적이고 집요한 활용은 오히려 화자에 대한 믿음을 배반하고 그나마의 로고스를 불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의 소설은 마치 모래의 책과 같아서 처음도 끝도 없고, 페이지는 점점 불어나고 있는 것 같다. 읽어 나갈수록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서이제가 부재하는 시간과 증식하는 공간을 통해 바깥의 존재, 떠도는 존재들의 조각난 불안감을 동시대 우리들에게 감응시키고자 했다면 그의 스타일은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P=NP 인지, P≠NP 인지 증명하시오
“세계 7대 난제 중의 하나인 이 문제를 서이제는 번호 ‘1.’ 아래에 던져둔다. 왜? 아마 공식으로 풀 수 없는 복잡한 문제도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는 것일 테다. 이 문제 풀이에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서이제를 읽는다는 것은 적어도 스도쿠(p.292) 퍼즐 게임에 참여하는 것 정도의 작심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작가가 여기저기 비워둔 빈칸은 분명 어떤 공식이 존재하고 “공식만 알면 만사형통”(p.248)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녹록지 않다. 서이제의 숫자와 빈칸은 공식만으로 풀 수 있는, ‘날로’ 먹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중간에 집어치우는 독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숫자를 꿰맞춘다고 될 일이 아니야, 책을 덮어 버린다. 그런데 몇 차례의 고비를 넘기고 얼추 다 맞춘다면, 그 스도쿠 한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숫자들 사이에서 인물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연산 가능한 숫자들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이는 번호 기호들은 시공간을 혼란스럽게 뒤섞고, 사건을 미궁으로 빠지게 한다. 숫자의 안내를 따라 번호를 재배열하고, 역순행적인 시간을 재배치해 본다고 해서 서사의 인과 관계가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숫자에 집착할수록 이야기는 더욱 꼬인다. 숫자를 아예 지워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의 흐름은 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다. 서이제는 서사 장면이 바뀔 때마다 무-의미의 숫자들을 붙임으로 시간의 혼란 외에 또 다른 어떤 효과를 도모한 것일까. 재현의 언어가 지닌 한계를 숫자의 기호들이 넘어서게 하는 것은 아닐까. 번호와 기호를 부여받음으로써 한 장면은 마치 액자 속 이미지처럼 정돈되고 구체적으로 감각된다. 즉, 불분명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자간과 행간의 모호함이 선명한 이미지로 붙들리는 순간 하나의 장면으로 각인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불안의 파편들은 숫자-기호 아래 선명해진다.
4. ‘너’들의 존재방식, 계정 삭제
새로운 체계의 상징들, 0과 1의 배열로 구성된 ‘디지털 코드 변환’은 낡은 체계, 낡은 코드를 추방하고 있다. 디지털에 의한 정보혁명 과정에서 우리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얻고 또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얻을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예감만이 확실하게 다가온다. 서이제는 잃어버림의 예감에 매우 민감한 작가이다.
나는 너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너의 이름과 성별과 나이와 얼굴과 목소리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너의 연락처조차 알지 못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계정 삭제이다. 서이제의 인물들은 말을 통해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다. 인물들은 메시지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정이 삭제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름과 성별과 얼굴과 나이를 모르지만 나는 너에게 사랑을 느낀다. 너를 기다리는 일은 하나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일이다. 인공지능 기반 채팅 프로그램은 더 많은 사용자와 더 많은 대화를 학습할수록 유창해진다. 프로그램이 텍스트로 말을 한다. 이제 텍스트와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곧 프로그램과 사랑을 느낄지도 모른다. 계정 삭제한 너처럼 이름과 성별과 나이는 모르지만, 프로그램은 인간처럼 복잡하지 않아서 당황하게 하거나 절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정보를 학습한 프로그램은 나에 대해 유창해질 것이다. 나와 말이 통해 어쩌면 사랑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제 두려운 것은 텍스트가 메시지가 되는 순간이다. 계정 삭제된 ‘사람’에 대한 미련을 계속 검색하고 있다. 기다림은 낮은 해상도에서 가능한 일이다. 사라지는 중에 있는 것들 사이에 사라지는 않는 나의 존재가 너무 낯설다.
겨울은 사라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겨울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 풍경은 지하철 창문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사라지고, 사라졌지만, 사라지는 풍경을 보아도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찍는 순간에도 인물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기술, 사라짐은 계속 개발 중이다. 화면 속으로 들어간 우리는 곧 사라질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사라지는 존재, 시선만 남는다. 기억은 사라지고 정보는 남는다.
기억, 흔적, 생각, 지워지고 사라지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서서히 지워지고 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서히 지워지고 사라지는 것을 빠르게 지우고 사라지도록 만들거나, 언젠가 지워지고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고 애쓰거나. 나는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을 부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인간 같았다.
가장 두려운 것은 기억을 잃는다는 것일 테다. 이미 기억은 인공적 기억 장치로 옮겨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실 잃을 염려는 없다. 다만 이름이 바뀔 뿐이다. 너와 나에 대한 기억은 인터넷 연결망 속 0과 1의 질서에 의해 클라우드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곧 정보가 될 것이다. 언제 불려 나올지 모르지만, 그것은 정보, 정보는 망의 계산과 순서 속에 병렬적으로 저장될 것이다. 서이제는 인공적 기억 장치로 옮겨지기 직전의 기억을 구출하려 하고 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두 동생, 잊히고 있는 두 존재에 대한 무한한 기다림은 정보화를 지연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 실존의 치열한 확인 과정이다. 과거의 아이들, 기억 속의 아이들을 잊는다는 것은 나의 과거를 상실하는 것이고,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들처럼 폐기되거나 파양될지도 모른다. 존재들은 경험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지 않은 과거를 끊임없이 상기한다. 성장한 ‘너’들을 상상하여 불러내고 기다린다. 그것은 자기 상실의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억의 해상도가 낮아질수록 우리의 상상은 구체적이 된다. 애처롭고 서글픈 기다림은 기억값이 제로가 될 때까지 계속되고 있다. 알고리즘 바깥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나는 너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