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엄마

by 제니스코치

[오제은 교수의 자기 사랑 노트]

자기 사랑 노트 5 "내 안의 장애물 찾기"


엄마는 또 두어 달 만에 문화센터를 그만두셨다.
3개월짜리 과정이지만, 처음엔 열심히 다니시는 듯하다가 이내 여기저기 마음에 안 드는 이유를 대셨다. 그러다 결국 늘 이렇게 끝이 난다.


저녁 무렵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 전화기 너머로 늘 시끄러운 모임 소리가 들린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엄마가 시부모님, 그러니까 내 친조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 후부터인 것 같다.

내 기준으로는, 평범한 60~70대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매일 저녁 모여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싶어 그 모임이 늘 탐탁지 않다. 외부 소리에 엄마와 긴 통화는 불가능했고, 내가 싫어하는 걸 아시는 엄마도 서둘러 전화를 끊으신다.

처음엔 왜 그런 데 나가냐고, 그 아줌마들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엄마가 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냐며 크게 다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시부모님이랑 살면서 나더러 어디서 스트레스를 풀라는 거냐, 엄마더러 죽으라는 거냐”라며 협박 같은 말을 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만나는 ‘그런 아줌마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화를 내셨다.


엄마는 나의 조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10여 년을 뒤늦게 시부모님을 모시는 큰며느리가 되어 지내셨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엄마의 푸념을 매일 들었다. 작은아버지들과 작은어머니들이 얼마나 무관심한지, 아빠가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지. 통화의 끝은 늘 똑같았다.
“아빠랑 오빠한테는 말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나에게는 죽고 싶다고, 이혼하고 싶다고 말하던 엄마가, 아빠와 오빠에게는 괜찮게 지내는 엄마라니.

그 말이 너무 버거웠다.

엄마는 ‘혼자의 희생으로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지내게 해주는 아내와 며느리, 오빠의 엄마’였고, 나는 ‘엄마의 힘듦을 들어주는 유일한 딸’이었다.


나는 엄마를 위해 좋은 책을 사서 보내드리고, 문화센터 강의를 신청해 드렸다. 엄마가 정말 힘들어할 때는 정신과 상담을 예약하고, 할아버지가 가실 수 있는 요양원을 직접 알아보고 답사하기도 했다.
“엄마, 집 앞 주민센터 있지? 거기에 시니어요가 있대. 일주일에 한 번만 가면 되니까 귀찮아하지 말고 가봐.”
“엄마, 백화점에서 드로잉 수업이 있더라. 엄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잖아. 내가 색연필이랑 스케치북 다 보냈어. 가서 엄마 나이 또래 친구들도 사귀고 점심도 먹고 와.”
하지만 엄마는 길게 가야 한 학기였다. 친구를 사귀지도, 수업 후 백화점 쇼핑을 하지도 않으셨다. 상담은 한 번만 가고, 처방받은 약은 한 알도 드시지 않았다. 엄마는 스스로 그 아픔과 희생을 택했다. 그렇게 싫다고 괴롭다고 벗어나고 싶다고 나에게 말하셨으면서 겉으로는 또 괜찮은 척 지내셨다. 그리고 그 ‘편안한 모임’에 나가 어울리셨다. 그곳에서는 아마도 엄마가 가장 부러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중학교 때까지 엄마는 동네에서 가장 멋지고 교양 있는 분이셨다. 늘 문화원에 다니셨고, 집에는 이젤이 펼쳐져 있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유화를 그리고 계셨다. 난 엄마가 자랑스럽고 좋았다. 엄마의 크로마하프 연주회에 꽃다발을 안겨드렸던 기억, 다니시던 절의 합창단에서 맨 앞줄 센터에 서 계시던 선녀 같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절 우리는 풍족했다. 사업이 잘되던 아빠 덕에 나와 오빠는 유학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IMF와 함께 아빠의 사업이 무너졌고, 아빠는 명예퇴직을 하셨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팔자에도 없을 것 같았던 자영업을 시작했고, 나는 유학에서 돌아와야 했다. 다행히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게 국립대에 진학했고, 과외를 하며 큰 용돈도 스스로 벌었다. 나는 부모님께 늘 자랑스럽고 걱정 없는 딸이고 싶었다. 두 분의 경제적 희생을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도 늘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고, 내 돈으로 대학원까지 다녔다.


결혼 후, 자상한 남편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시부모님 덕분에 다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됐다. 마음의 안정감을 되찾았고, 경제적으로도 든든한 울타리가 생겼다. 그즈음 부모님은 자영업을 접고, 조부모님이 살던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것은 장남으로서 당연히 부모님을 모신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아빠의 어려운 사정을 안쓰러워하신 조부모님에게 떠밀리듯 들어가신 것이었다. 그 때문에 엄마는 이유 있는 희생을 감내할 수밖에 없으셨다.


엄마는 안정적으로 사는 딸인 나를 자랑스러워하시면서도, 내게 더 쉽게 감정을 흘리셨다. 엄마는 자신의 힘듦, 아빠의 경제적 어려움, 오빠네 아이들의 잔병치례까지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모님께 적은 양이지만 돈을 보내드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은 나의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 엄마를 향한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했기에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엄마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답답해진다. 멋지게 잘 사는 나를 엄마가 좋아하시는 건 알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난다. 엄마가 ‘너는 알아서 잘 사니까’라며 엄마와 엄마 주변의 힘듦과 괴로움을 내게 또 흘릴까 봐. 어느 때에는 엄마가 흘리기도 전에 내가 먼저 묻기도 한다.

'엄마, 힘들고 부족한 거 나한테 흘려. 엄마가 나 아니면 누구에게 말하겠어.'


때때로 엄마는 그 희생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나를 죄책감에 가두기도 한다. 다리를 놓아드려도 올라오지 않는 엄마를 보는 것 같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 대신에 엄마는 고생하고 희생하는 편을 택하고 나를 그 감정에 조금씩 휘말리게 하는 것 같다. 난 엄마의 희생을 바란 적도 없고 우리 집에 와서 쓰레기통까지 반짝반짝 닦아주며 힘들어하는 엄마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엄마가 예전처럼 빛을 찾고, 못다 이룬 꿈을 지금이라도 이루며 진정한 황금기를 보내시면 좋겠다. 내가 진짜 바라는 엄마의 모습을 하고 나도 기꺼이 나의 것을 내어 드리고 싶다.


나는 가끔 궁금하다. 엄마는 정말 내가 잘 사는 걸 바라시는 걸까? 아니면 함께 힘들고 아파해주길 바라시는 걸까? 두렵다. 요즘 가장 두려운 것은 내가 더한 모습으로 내 아이들에게 아픔을 대물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꼭 나의 아픔을 치유해서 내 아이들에겐 회복의 흔적만을 물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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