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도 타이밍이다

시절인연들에게 보내는 나의 마음

by 유니로그

원래 제목은 ‘사랑도 타이밍이다’였다.

스쳐 지나갔던 사랑의 인연들을 쓰려했지만,
아직 그 감정이 다 정제되지 않아
‘사랑’ 대신 ‘시절인연’이라 적었다.
감정보다는 조금 더 넓은 의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담고 싶었다.


인간은 태어나 사회화를 겪으며
수많은 인연을 지나쳐 간다.
그중에는 부모 형제보다 더 가깝던 사람이
헤어질 땐 남보다 먼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인연을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시절인연’이라 부르곤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시절인연이란
무엇이든 이루어질 때가 있고,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만남이나 일이 성립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결국 모든 관계에도 때가 있는 셈이다.


나는 유치원 선생님부터,
초등학교 때 처음 ‘베프’라 부르던 친구,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친구들,
고등학교, 대학교, 유학, 첫 사회생활, 그리고 해외생활까지
정말 다양한 시절인연을 지나왔다.


그들은 때로 내게 좋은 자양분이 되어주었고,
때로는 상처로 남았다.
내가 상처를 주기도 했고,
아직도 미안한 얼굴들이 세세히 떠오른다.


특히 대만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결혼식엔 대만이 빗장을 걸어 잠가 오지 못했고,
결혼 후에는 바로 임신과 육아가 이어져
그곳을 다시 찾지 못했다.

대만이라면 치를 떠는 남편의 영향도 컸다.
(대만에 나를 혼자 보내면 안 돌아올 것 같다고, 농담처럼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중 한 친구는 특히 나에게 큰 존재였다.

늘 나를 걱정해 주고, 내 편에서 모든 걸 바라봐주던 사람.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도
그 친구가 있으면 이상하게도 버틸 수 있었다.

그 친구는 한국에 가고 싶어 했지만 나는 말렸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다.
“너는 하는데 왜 나는 못 해?”라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그 말을 들으면 도와줄 수도 없고 함께 살아줄 수도 없는 내 처지가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 그저 현실적인 이유를 내세워
“안 되는 거야”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새로운 도전을 막은 셈이 되어버렸다.


그 일 말고도 작은 배려들이 쌓여
나에게는 당연함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친구의 소중함을 잊어버렸다.
사람에 치여 지쳐 있던 나는
그녀가 점점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내 힘듦만 이야기하다 결국 그 친구를 영영 잃어버렸다.


그녀가 떠난 뒤에야 알았다.
사랑과 우정은, 정말 한 끗 차이라는 걸.
그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연인처럼 아프다.
내가 해주지 못한 일들만 떠오르고,
그녀가 나에게 해준 일들만 남는다.
그 감정이 동성에게 처음 느껴본 종류라
지금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짐했다.
앞으로 오는 인연들에게는
이토록 바보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그 친구 외에도 수많은 시절인연들이 있다.
대학 시절, 불안한 미래를 함께 견디던 친구들.
유학 시절, 낯선 나라에서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중국 친구.
자취방을 보여주고, 남자친구를 소개해주며
국적을 떠나 진짜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던,
지금은 이름조차 희미한 그 친구.


이토록 우리는 수많은 인연을 만나고,
또 흘려보내며 살아간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고,
그리고 다시 헤어진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사람을 배우고,
한 우주를 들여다보며,
인생의 배움과 후회, 연민을 남긴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외로워
시간을 써가며 인연을 만들고,
또 후회하며 힘들어하는 걸까.
‘인간’이라는 말속에 이미 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人)과 사람(間) 사이에 살아야 하는 존재, 인간.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나는 이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걸까.

가끔 인간에게 실망하고, 경멸이 일어나도
다시 누군가의 따뜻함 속으로 들어가 치유받고 싶어지는 건
결국 나 역시 인간이라서일 것이다.


회사 일을 하면서 자주 썼던 문장이 있다.

“사람이니까,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사람이라서 실수하고,

사람이라서 질투하고,
사람이라서 분노하고, 또 이해한다.
그 생각을 하면 조금은 덜 미워졌다.

결국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사람이다.

수많은 인연 속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주며 살아가는 것,
그게 어쩌면
나의 실패한 시절인연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또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시절인연이 되어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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