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없이 피해자만 남은 관계의 덫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까,
어떤 상처를 들춰야 내가 가장 솔직해질까 생각해 봤다.
겉으로 떠오른 건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수없이 씹고, 말하고, 되새기며 이미 소화가 끝난 상처들.
그건 이제 나에게 익숙한 통증이었다.
진짜로 아팠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나를 위한다고 조언을 건네던 사람들,
내가 힘들 때 위로를 해주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네 말은 듣기 힘들다”며 나를 밀어냈을 때였다.
그때의 나는 ‘왜?’라는 말만 수십 번 되뇌었다.
상처는 깊었고,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감정만 남고, 사건은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 내 기억에서 지운 것처럼.
그 상처는 형태를 잃은 채 마음 한구석에 고여 있었다.
요즘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내 마음을 건드린다.
결국 인간은 상대에게서 자기 자신을 투영해 본다는 걸 느낀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가족이든 — 우리는 상대를 ‘그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해석한 그 사람’으로 본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을 거울삼아 관계를 맺고,
그 거울 속에서 서로의 그림자를 본다.
그래서 관계에는 늘 오해가 끼고,
서로가 서로의 상처가 된다.
회사라는 작은 세계에서도 그건 똑같았다.
상사의 지적에 상처받은 신입,
신입의 무지에 지친 상사.
여기서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일까.
모두가 피해자이고, 진짜 가해자는 어쩌면 ‘회사’라는 시스템일지도 모른다.
내가 왕따를 당했다고 말하면 나는 피해자가 된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나를 빌런이라 부를 것이다.
“눈치 없고, 싸가지 없는 애 때문에 우리가 힘들었다.”
그들의 서사 속에서 나는 여전히 불편한 인물로 남아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피해자다.
누군가를 ‘나쁜 사람’이라 단정하면 그 순간 내 상처는 잠시 편해지지만,
그건 진짜 치유가 아니다.
내가 왜 그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상처받았는지,
그 사람이 왜 나에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끝없이 되짚다 보니 결국 이런 결론에 닿았다.
“그 사람에게 나는, 그 사람의 이야기 속 빌런이었다.”
그가 나를 미워해야만 그 사람의 행동이 정당화될 테니까.
그래야 그도 자기 서사 안에서 버틸 수 있을 테니까.
한때는 다짐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사람에게 상처 주지 말아야지.”
하지만 이제 안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도 완벽히 선하지 않다는 걸.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어딘가에서는 또 누군가에게 빌런이 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피해자이고, 동시에 누군가의 가해자다.
누군가에겐 천사이자 구원자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인생의 빌런일 수도 있다.
그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아이러니다.
그리고 내가 상처를 통해 배운 가장 큰 진실이다.
결국, 내가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서 배운 건
‘미러링’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투영해 상대를 보고,
그 투영 속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배우며 산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그저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인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조금 덜 아프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