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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Mar 21. 2023

거미

부모님의 희생은 당연한게 아니야

  그가 돌아온 것은 4년 전이었다. 그는 마치 제갈량이 출사표를 던지듯 크게 성공해서 돌아오겠노라고 시골의 전답을 팔아 서울로 갔었다. 그러나 떠난 지 5년 만에 패잔병이 되어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떠날 때는 아내, 그리고 아들과 함께였지만 돌아올 때는 둘 뿐이었다. 그는 자기의 아내가 어떤 남자와 야반도주했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매일 술에 취해 물건을 부수고 손찌검해 대는 그와는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빠는 무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이냐고 황당해하며 속을 끓였다. 엄마는 묵묵히 손자를 보살폈지만, 그 속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부끄러운 모양새로 시골집에 돌아온 그는 한동안 집을 나간 아내를 잡겠다고 이리저리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처가에 가서 숨긴 곳을 대라며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여기저기 지인들의 집에 전화하여 욕설을 퍼부으며 민폐를 끼치곤 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아내를 찾을 수가 없으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쯤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늘 술에 절어있는 그를 나무라는 마을 사람들과 욕설해 대며 몸싸움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여기저기 다니며 대신 허리를 굽혀 사과했고,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면서 엄마는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잘 안 된다며 이삼일에 한 번꼴로 소화제를 먹기 시작했다. 병원에도 가보고 약국에 들러 온갖 종류의 소화제를 사다가 먹어 봤지만, 엄마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엄마의 속내를 뻔히 알고 있는 마을 아주머니들은 하도 속을 끓여 화병이 난 게 분명하다고 했다. 어떤 무속인은 그렇게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으니 약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굿을 한번 하자고 했다. 집에 기가 센 사람이 들어와 엄마의 기를 누르고 있으니 이러다가는 큰일을 치를 수도 있다며 겁을 주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저마다 자기의 기준으로 엄마의 병을 진단했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잘라버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엄마가 새벽에 일어나 싱크대 위에 찬물을 떠 놓고 손바닥을 비벼가며 기도하더라고 언니가 나에게 전했다. 나는 혹시 절은 하지 않더냐고 우스갯소리로 되물었지만, ‘오죽하면’ 그럴까? 싶은 마음에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간절한 기도도, 그리고 입에 달고 사는 소화제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 한 채, 엄마는 점점 살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깽이같은 년!”

재작년 겨울, 그가 재혼한 이후 엄마의 입에서는 이틀이 멀다고 이 말이 흘러나왔다. 엄마는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외는 양 말끝마다 그 말을 덧붙였다. 그럴 때면 아빠는 네 엄마는 또 그런다며 그저 허허 웃으시고는 맘에 없는 핀잔을 주었다. 힘겹게 농사지은 것들을 일언반구 말도 없이 친정으로 실어 나른다는 둥, 툭하면 친정 식구들 불러 집에서 술판을 벌인다는 둥 엄마는 그의 아내의 모든 행동이 불만인 듯했다. 그의 아내가 들어온 이후 엄마와 아빠를 대하는 그의 말과 행동은 점점 더 고약해졌고, 그럴 때마다 한마디 못 하고 넘기는 아빠의 우유부단한 태도 덕에 엄마와 아빠는 뒷방 노인네 취급을 받으며 날로 처량해져만 갔다.     

  사실, 엄마는 그가 재혼하면 이제 엄마 인생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려니 기대하고 있었다. 사춘기로 방황하는 손자 녀석도 힘에 부쳤고, 하루가 멀다고 술에 취해 주사를 늘어놓는 그도 더는 엄마의 몫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년 전 그가 재혼하겠다며 여자를 데려왔을 때 엄마의 표정은 담담했으나 그 속마음은 둥실둥실 구름 위를 떠다녔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엄마에게는 며느릿감의 됨됨이며 마음 씀씀이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고, 그가 결혼하겠다는 말 한마디에 ‘이제 나도 해방이다’하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결혼을 시켜야겠다는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아빠는 그리 썩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자고로 먹을 것이 오고 가야 정이 싹튼다는 것이 가난한 시절을 힘겹게 버텨온 아빠의 신조인데, 앞으로 시부모가 될 어른을 뵈러 오는 어려운 자리에 빈손으로 터덜터덜 왔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다시 어린아이 같아진다고 했던가. 좀처럼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 아빠가 나를 앉혀놓고 며느릿감 흉을 보고 있었다. ‘불여시처럼 눈꼬리가 올라갔다’라는 둥 ‘어른을 보면 일단 절부터 해야 하는데 덥석 자리를 꿰차고 앉아있다’라는 둥, 또 ‘목소리가 걸걸한 게 술은 기본이고 담배까지 피우는 것 같다’라는 둥 하나하나가 다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런 가족들의 생각을 그에게 이야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아빠가 무슨 의견을 내면 중늙은이 취급을 하며 가만히 좀 계시라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고, 듣기 거북한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입을 막았다. 엄마의 무조건적인 허락도, 아빠의 못마땅한 마음과도 상관없이 인사 온 지 3개월 만에 결혼했다. 그의 결혼과 함께 마음의 짐은 오히려 두 배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마법 주문도 시작된 것이다.          

  언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월요일 아침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사흘간 꿀맛 같은 여름휴가를 즐기겠다고 마음먹었던 내 생각도 그 전화벨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네가 좀 내려와 줘.”

아마도 여름방학이라고 조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곤충채집 숙제를 내준 모양이었다.

  “아니, 요즘에도 그런 숙제를 내주는 학교가 있어?”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어떡해. 숙제라는데…….”

짧게 오간 대화 속에서도 언니는 귀찮아하는 내 속내를 충분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휴일도 없이 가게 일로 바쁜 언니가 시간을 낼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삼 년 전 뺑소니 사고로 형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쌍둥이 조카들과 함께 살아보려고 초등학교 후문 앞에 분식집을 열었다. 본디 벌이가 시원치 못한 데다가 방학이라 그나마 아이들 코 묻은 돈도 구경하기가 어려워 이번 달 월세도 빠듯하다고 하소연하는 언니가 가게 문을 닫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늘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사는 언니를 생각하니 순간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일 년에 한 번뿐인 휴가가 아닌가.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었다.

  “요즘은 인터넷만 접속하면 다 알아서 해 주는데, 내가 꼭 가야 돼?”

쥐어박는 듯한 나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미안……. 부탁 좀 하자. 응?”

언니의 푸념 섞인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 전화를 끊고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나는 영동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시동을 켜자마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 손은 습관처럼 라디오 채널을 검색하고 있었다. ‘치지직’ 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려 손을 뻗어 파워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무슨 박사라는 양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에어리 염낭거미는 알을 낳을 준비가 되면 잎을 싸고 방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끼를 지키는 것이죠. 그리고 새끼가 부화하고 두 번째 탈피를 거치면 어미는 살아있는 채로 자신이 지킨 새끼들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그리고 새끼들은 그 어미를 양분 삼아 바깥으로 나와 독립하여 살게 되는 것이죠.

  아마 이것은 자연의 순리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 어미 거미도 자기 어미를 먹고 자랐으니 새끼들에게 몸을 내어주는 것이지요. 정말 희생적인 모성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그 박사의 말에 왠지 모를 언짢은 마음에 신경질적으로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라디오에서는 “쿵짝쿵짝”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노랫말과 그 박사 양반의 말이 머릿속에서 묘하게 뒤엉켰다. 그는 아름다운 모성애라고 했다. 하지만, 자식에게 몸을 내줘야 하는 어미의 마음은 생각해 봤을까? 나는 문득 모성애라는 아름다운 말로 위장하여 어머니들에게 조건 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두 시간 남짓 달려 영동에 도착했다. 밝은 얼굴로 나를 반기던 조카들은 잠자리채와 채집가방을 나눠 들고는 당장이라도 숲으로 산으로 떠날 기세였다. 귀찮은데 그냥 잠자리랑 매미 몇 마리 잡아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저 나 혼자만의 꿈일 뿐이었다.

  “이모, 숙제 잘해가면 선생님이 상 준대.”

초등학교에 입학 후 첫 방학을 맞은 쌍둥이 조카들은 마치 상을 예약이라도 해 놓은 듯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어른들 생각에는 그저 싸구려 노트이고 질 나쁜 연필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뭔가 커다란 훈장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더 좋은 노트와 연필을 사준다고 구슬려도 소용이 없었다. 조카들은 무조건 다른 애들과 다른 특별한 것을 잡아달라고 떼를 썼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하던 중,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우리 외갓집 가자!”

언니에게 조카들을 데리고 갈 테니 가게 문 닫고 그쪽으로 오라고 전화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조카들을 차에 태워 시골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놈이 아직도 있으려나?’          



  작년 여름, 휴가차 언니 식구들과 함께 시골집에 들렀을 때였다. 교회 뒷마당에 주차한 후 가방을 두려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다. 그 순간 나는 고요한 정적과 함께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항상 사람들을 향해 열려있던 안방의 미닫이문이 닫혀있었다. 이상한 생각에 살며시 안방 문을 열었을 때였다. 그는 큰 비밀이라도 들킨 양 허둥대며 허리춤에 무언가를 숨기는듯했다. 나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아빠 엄마의 행방을 물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인기척 좀 하라고 역정을 내고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사라졌다.

  차에서 짐을 내려 거실로 옮겨 놓고는 앞마당으로 나갔다. 시골집들이 그렇듯 엄마는 마당에서 한 편에 일구어 놓은 작은 텃밭으로 큼지막한 소쿠리를 들고는 저녁 찬거리를 구하러 갔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나를 반기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산과 들에서 이름 모를 꽃들을 하나둘씩 뽑아와 밭 가장자리에 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엄마가 새로운 꽃을 옮겨 심을 때면, 아빠는 그곳에 콩이라도 한 줄 심으면 밥에 넣어 먹을 수라도 있을 텐데 괜한 짓을 한다고 무안을 주기 일쑤였지만, 엄마의 꽃밭 가꾸기는 멈추질 않았다. 그 덕에 가끔 시골집에 들를 때면 뭔가 새로운 아이들이 있지는 않을까 하여 엄마의 텃밭을 기웃거릴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텃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줄 알았던 엄마가 몰래 향기를 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일흔 살의 나이에도 아직 소녀 같은 감수성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순간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엄마에게 다가가 어렸을 적 꿈이 무엇이었는지 물었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엄마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아니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나에게 되물었었다. 엄마는 꿈을 꿀 여유도 없이 그저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소쿠리를 수돗가에 내려놓고 엄마의 애정으로 환하게 피어난 아이들에게 잘 지냈냐는 인사와 함께 한 바가지씩 물을 퍼주었다. 그러고는 저녁 찬거리를 위해 고추며 상추, 가지, 호박들을 소쿠리 가득 땄다. 그러는 동안 조카들은 ‘잠자리’라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잠자리 꼬리에 실을 묶어 한참을 가지고 놀다가 그도 싫증이 났는지 양쪽 날개를 떼어내고는 버둥거리는 잠자리를 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잠자리가 움직이지 않자 수돗가에 내팽개쳐버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모. 이리 좀 와봐.”

조카들은 신기한 것을 발견한 빛나는 눈으로 나를 불렀다. 텃밭 옆에 있는 창고 한 귀퉁이에서 거미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조카들은 나에게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한 후, 내팽개쳐두었던 잠자리를 살포시 거미줄에 붙여 놓는 것이었다. 거미줄의 요동을 느꼈을까. 거미는 순식간에 잠자리가 있는 곳까지 다가와 거미줄로 휘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게만 보이던 거미의 행동이 나중에는 무섭게 느껴졌다. 이미 죽은 듯 미동도 없던 잠자리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 전에 날개를 잘려 버둥거리고 있던 잠자리의 모습과 거미줄에 매달려 죽을힘을 다해 탈출해 보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뒤엉켜 끔찍하게 느껴졌다. 쓸모없다고 여기는 머릿니도 살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잠자리는 더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에 조카들에게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는 다짐받았었다.          

 



  지난여름의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거미를 잡으려고 시골집으로 향하고 있는 나의 행동이 모순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카들의 빛나는 상장을 위해 기꺼이 거미를 잡아 주겠노라고 마음먹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시골집에 도착했다. 조카들은 잠자리를 잡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는 작년에 그놈이 있던 창고 귀퉁이를 살폈다. 하지만 그곳에 그놈은 없었다. ‘지금까지 있을 리가 없지.’ 작년의 그곳에 있던 녀석을 지금 찾고 있는 내 모습이 순간 우습게 느껴졌다. 결국 잠자리를 잡던 조카들까지 동원해 처마 밑과 창고 구석구석을 살폈다.      

  “찾았다.”

내 외침을 듣고 조카들이 달려왔다. 지난번보다 좀 작은 녀석이었다. 조카들과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저놈을 어떻게 잡으면 좋을까 회의를 했다. 조카들은 손으로 잡아보자는 둥 파리채로 내려치면 될 것 같다는 둥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았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묘안은 모기 잡는 살충제였다. 그런데 막상 그놈에게 뿌리려니 괜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네 어미가 지난번에 잠자리 잡아먹었으니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나의 행동을 합리화시킨 후 앞이 뿌옇게 될 정도로 살충제를 뿌렸다. 그러고는 잔뜩 오그라들어 볼품없는 몰골로 땅에 떨어진 거미의 시신을 수습하여 조카들의 숙제를 마무리해 주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언니가 가게 문을 닫고 시골집으로 왔다. 언니는 오래간만에 삼겹살파티를 하자고 했다. 쌈 채소를 씻고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이는 동안 온 동네에 냄새를 풍기며 삼겹살이 먹음직스럽게 익어갔다. 조촐한 저녁 만찬이 무르익을 무렵 그와 그의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등장했다.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는 엄마의 말에,

  “저희는 아범 단골 한우 전문집에서 저녁 먹고 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기다려서 먹는다는데 우리는 단골이라 그냥 들여보내 주더라고요. 일 등급이라고 하더니 다른 데랑은 확실히 틀리더라고요. 얼마나 맛있던지 둘이 4인분이나 먹었어요.”

나는 그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오히려 마늘 냄새가 향기롭겠다는 생각에 한참을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는 그 입을 냄새나는 마늘로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의 아내의 눈치 없는 말 한마디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니? 잘했다. 옷에 삼겹살 냄새 배니 저녁 먹었으면 그만 집에 가 봐라.”

그와 그의 아내는 엄마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러면 가보겠노라는 말을 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들은 엄마 아빠는 구경도 못해봤다는 한우전문점이 단골집이라고 했다. 둘만 먹고 왔으면 자랑하지 말지 꼭 와서 그 이야기를 해야겠냐고 언니에게 따지듯 말했지만, 언니는 그들의 행동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는 듯 담담했다.          

  조카들의 숙제를 끝내주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휴가가 끝나는구나’ 한탄하고 있을 때쯤 아빠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아빠는 그가 아빠의 신분증과 통장, 인감도장을 가져갔다고 했다. 아빠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이지만, 실제로 그것들이 흔적을 감춘 것은 일 년도 넘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순간 나를 보고 허둥지둥 도망치듯 사라진 그날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가져간 것은 그뿐만 아니었다. 아빠는 아빠 명의였던 땅의 주인이 그로 바뀌어 있더라고 했다. 무일푼으로 시골로 내려와 술로 세월을 보내던 그가 여기저기 흥청망청 인심을 쓰고 다닌 것이 그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그렇게 한참을 나에게 하소연했지만 정작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고 엄마는 답답해했다.



  작년 봄, 시골로 내려와 술로 시간을 보내던 그가 뜬금없이 개를 길러보겠노라고 아빠의 고추밭에 축사를 지었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무슨 산악회 회원이라며 속리산으로 설악산으로 놀러 다니기 바빴고, 그 개의 뒤치다꺼리는 고스란히 엄마와 아빠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올봄, 개가 짖는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는 개소리에 귀가 아파 살 수가 없다는 어이없는 핑계와 함께 남아있는 개들을 몽땅 처분하고는 아예 축사 문을 닫아버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전부터 소문만 무성하던 산업단지 조성이 가시화된 그즈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토지 보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마을 사람들과 좀 더 많은 보상금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 산업단지 조성의 반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부터 시작해 논과 밭에는 단지 조성을 반대한다는 깃발과 플래카드가 휘날렸다. 어떤 날은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한 손에는 피켓을 든 채 군청 앞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군수 물러가라’, ‘… 보상하라’고 소리를 질러가며 시위했다. 또 어떤 이는 집집마다 서명을 받고 다니느라 농사를 뒷전으로 미뤄두기도 했다. 예년 같으면 논에는 벼가 패어 그 자태를 뽐내야 하건만, 논은 벼인지 피인지 모를 정도로 황폐하게 변해버렸고, 밭에는 붉게 물들다 못해 바닥으로 추락해 버린 고추들이 즐비했다.     

  그런데 그와 그의 아내는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좀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 것도 상관이 없었다. 산업단지 조성 발표 이후 당장 수중에 수억의 돈이 들어올 줄 알았던 그는 그 보상이 점점 늦어지자 하루하루를 술로 버티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산업단지 조성을 반대하는 마을 주민과 주먹다짐하는가 하면, 시간을 끌고 있는 군청에 불을 질러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그의 그러한 행동을 부추기는 것은 그의 아내였다. 발표가 났으면 빨리빨리 보상을 진행해야 하지 않냐, 더 시간 끌어봤자 더 받기는 힘들 텐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둥 가뜩이나 안달이 나 있는 그를 들쑤시고 있었다. 사실 땅이며 논, 임야 중 말없이 명의 이전을 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토지 보상이 그와 크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중에 수억의 돈이 들어온다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네 돈이든 내 돈이든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서 빨리 그 돈이 아빠의 통장으로 들어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사별한 아빠와 재혼하여 나를 낳은 엄마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 못내 한으로 남은 듯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들 다 필요 없고 요즘은 딸이 대세’라며 엄마의 허전함을 달래 보려 했지만, 그러한 엄마의 아들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미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는 그저 아들을 낳지 못한 여자일 뿐이었고, 남들의 이야기는 아들 낳은 엄마들의 호강에 겨운 불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그런 한을 부추긴 것은 두 달 전, 그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토지보상금이 아빠의 통장에 입금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였다. 엄마는 분식집을 차릴 때 얻었던 경숙 언니의 빚을 갚아주고 싶어 했다. 언니의 분식집 매출이래 봤자 뻔한데, 그걸로 대출이자를 충당하고 아이 둘을 키우느라 쩔쩔맨다고 늘 걱정이었다. 엄마의 신세 한탄과도 같은 말에 아빠는 ‘이제 돈이 나왔으니 지도 사람이면 통장이랑 도장 가져오겠지’ 하며 기다리라고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가 무의미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며 속을 끓이는 동안 그와 그의 아내는 평수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고, 그의 차는 중형세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 엄마의 생일이 다가왔다. 엄마의 일흔 번째 생일을 앞두고 뷔페 집이라도 빌려 잔치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언니의 말에 그는 번거롭다며 집에서 한 끼 해결하자고 했다. 거창하게 말하면 마을 잔치였지만 사실은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아침 한 끼 대접하는 정도였다.

  생일 전날이 되자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손을 거들기 위해 집으로 모였다. 여기저기서 전을 부치고 고기를 삶아내는 등 음식 장만으로 한바탕 시끌벅적했다. 오래간만에 있는 마을 잔치라며 사람들 역시 즐거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후가 되자 기름 냄새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며 그의 아내는 건넌방에 자리를 펴고 누웠고, 그는 환기 좀 시켜가며 하라고 큰소리를 냈다. 그들의 행태에 마을 아주머니들의 수군거렸고, 뒤통수가 따가웠는지 그의 아내는 한 시간쯤 후에 다시 나와 거드는 시늉을 했다.     

  그날 저녁상을 막 치운 뒤였다. 언니가 아빠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며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 같았다. 이내 아빠와 언니는 거실로 나왔고, 아빠는 가족들을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빠는 토지보상금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빠는 바로 그에게 가져갔던 통장과 도장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소중한 분신이라도 빼앗기는 양 눈을 부릅뜨고 아빠에게 물었다.

 “그건 왜 가져오라고 하세요? 어련히 잘 가지고 있을까. 아버지가 그 큰돈이 뭐가 필요하시다고…….”

그는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으나, 그 목소리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탕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나는 그의 말속에서 미세한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걸 니가 왜 가지고 있냐? 그게 니 돈이야? 평생 나랑 니 엄마가 뼈 빠지게 벌어 모아 놓은 건데 니가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 되지. 그동안은 당연히 니가 가져와서 이러이러해서 돈이 좀 필요하니 필요한 만큼 달라고 할 줄 알았다. 그래야 사람 새끼지. 근데 그게  니 돈인 양 움켜쥐고 돼지 새끼처럼 욕심을 부려? 지 동생은 힘들어 다 죽어간대도 니 손에 움켜쥐고 내놀 생각을 안 해?”

아빠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아마도 그동안에 참고 넘어갔던 말들을 쏟아내실 모양이었다.      

  그때 엄마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다 필요 없으니 경숙이 필요하다는 만큼만 줘라. 그 많은 돈 싸 들고 갈 것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남도 도와주는 마당에 동생이 그렇게 힘들다는데 그것도 못 해주니?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벌 받어.”

엄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엄마에게 퍼부어댔다.

“내가 왜 벌을 받아요? 그동안 엄마한테 그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잘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 돈을 경숙이를 왜 줘요? 막말로 재하고 나하고 피가 섞이길 했어, 아버지 자식이길 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온통 가시 돋친 말들뿐이었다. 그의 말에 엄마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둔탁한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야 이년아. 너 왜 그렇게 살어? 아니, 그렇게 힘들면 니 시댁에 가서 도와달라고 하지 왜 친정에 와서 나를 이렇게 괴롭혀!! 출가외인이 툭하면 여기 와서 난리냐고!! 빌어먹을.”

그 말들이 언니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을 것이다.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을 것이다. 언니는 대답대신 눈물만 뚝뚝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막무가내로 퍼 붙는 그의 말에 아빠도 적잖이 화가 나셨던 것 같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통장이랑 도장 가져와! 그게 니 돈이야? 내 돈 내가 쓰겠다는데 니가 무슨 말이 많아?”

아빠의 말에 그는 스스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식으로서 차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뱉어버렸다.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시면 제사 지낼 사람이 누군데 그렇게 말씀하세요? 막말로 저년들이 제삿밥 차려줘요? 아버지 나 섭섭하게 해서 좋을 것 하나 없을 텐데……. 알았어요. 가져올 테니까 다시는 나 찾지 마세요.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해도 난 안 올 거니까 연락도 하지 마세요.”

마치 초등학생이 떼를 쓰는 것 같은 그의 말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뭐야? 이 새끼야. 말이면 단 줄 알아? 다시 한번 말해봐.”

아빠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뺨을 후려쳤다. 팔십이 다 돼가는 노인의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났는지 모두 경악하고 있을 때쯤 그의 아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버님 정말 너무 하세요. 아범이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그렇게 못 미더우세요? 왜 아들을 불효자로 만드세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아범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버님도 그러시면 안 되죠.”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어. 나도 다 필요 없으니까 집에 가자구. 이놈의 집구석 내가 다시는 오나 봐라.”

  “아니 왜요? 이렇게 억울하게 갈 순 없지. 안 그래요?”

그의 아내는 이대로 집에 가기는 억울하다고 했지만, 포기해야 하는 돈이 아까워서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잘 살아주지 못해서, 그래서 친정에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가 속상해서 우는 언니, 분을 삭이지 못하는 아빠, 맞은 것이 억울하다는 듯 씩씩대고 있는 그, 거기서 한마디 거들고 있는 그의 아내의 모습. 이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마치 한 편의 삼류 드라마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드라마에서 퇴장하고 싶다는 생각에 자리를 뜨려는 나를 주저앉힌 것은 엄마의 통곡 소리였다. 엄마는 다 필요 없다고 처음으로 온 가족이 있는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고, 이어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헛살았다. 내가 이 꼴을 보자고 이리도 오래 살았나 보다. 그래. 경숙이는 니 동생이 아니란 말이지? 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난 니 에미도 아니니 나 죽으면 제사도 안 지내겠구나.”

엄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가슴 한쪽이 찌릿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관했다.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현기증이 일었는지 휘청하더니 곧바로 몸을 추스르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도 곧바로 엄마의 뒤를 따랐다.      

  시골의 밤 풍경이 다 그렇듯 칠흑 같은 어둠으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듬성듬성 놓여있는 몇 개의 가로등은 개구쟁이 녀석들의 돌팔매질 때문인지 깨져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늘에는 작은 쿠키만 한 초승달만 덩그러니 걸려있어 어디론가 발길을 옮기는 엄마의 뒷모습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나는 엄마가 눈치채지 못하게 거리를 두고는 뒤를 따랐다. 그런데 순간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엄마가 갈 곳은 근처에 있는 비닐하우스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니 밭에 옮겨지기를 기다리는 배추 모종들이 푸릇푸릇하게 올라와 있었다. 엄마는 순간 내가 따라왔다는 것을 눈치를 채고는 얼른 눈물을 훔치는 듯했다.

“엄마. 괜찮아?”

엄마는 대답 대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다른 새엄마들은 전실 자식 구박도 잘한다는데, 엄마는 왜 한마디도 못 하고 평생을 속을 끓여. 엄마 보면 정말 답답해 죽겠어.”

“그렇게 말이다. 내가 다 모자라서 그렇지.”

“엄마. 그냥 다 잊어버려.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엄마 호강시켜 줄 테니까.”

“니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그러면 니 오빠가 그 돈 혼자 다 가질 생각도 못 했을 거고, 니 아빠도 지금처럼 그저 오빠 하는 대로 반벙어리처럼 있지 않았을 텐데…….”

“으이구, 엄만 또 그 소리야? 기다려. ‘아들보다 딸이 더 좋구나!’ 할 날이 있을 테니.”

엄마는 그제야 살짝 미소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 안은 마치 엄마의 품처럼 따뜻하고 아늑했다.

  엄마와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는 그가 현관문이 부서져라 발로 걷어차고는 그의 아내와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아침이 되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찌감치 건너왔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물론 그의 손에 도장과 통장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엄마 생일상을 차리니 아침 식사를 하러 오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힘들게 집에서 생일상을 다 차렸다고 효자라고 했다. 언니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와 그의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를 뒤로하고 아직 기척이 없는 엄마를 깨우러 방으로 들어갔다. 새벽부터 거실에 나와 있던 아빠는 이상하게 엄마가 오늘은 늦잠을 다 잔다고 신기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날 엄마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일흔 번째 생일을 앞둔 하루 전날 엄마는 더 이상 생을 버틸 힘을 잃었던 것 같다. 의사는 심장마비라고 했다. 순간 나는 엄마를 그리 만든 사람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 수십 년의 세월을 가슴 졸이며 살게 했고 작은 행동 하나에도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 그래서 마음에 커다란 쇠뭉치를 안고 살아가게 했던 그 사람일까. 아니면 평생을 우유부단한 태도로 엄마의 희생을 강요한 그 사람일까. 그도 아니면 잘 살지 못해 엄마의 아픈 손가락으로 자리 잡은 그 사람일까.

  떠난 엄마를 다시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언니는 싸늘하게 굳어있는 엄마를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런 언니 뒤에서 동네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맘에도 없는 눈물을 훌쩍이는 그의 모습을 보니 끔찍하다 못해 구역질이 났다. 때마침 생일 초대를 받고 왔던 마을 사람들은 별안간 닥친 비보에 한 가족처럼 가슴 아파하며 발길을 돌렸다. 결국 엄마의 일흔 번째 생일을 위해 마련된 음식들은 조문객들의 입으로 들어가 버렸다. 언니가 음식을 가지러 창고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는 주인 없는 생일 케이크를 품에 안고 울고 있었다. 언니와 나는 한동안 그곳에서 나가지 못했다.

              


  엄마의 장례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으로 반쯤 넋이 나간 채 아무 의욕도 없어 보이는 아빠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그는 다시 마지막 남은 아빠의 고추밭에 펜션 사업을 해보겠노라며 밭을 메우고 땅을 다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 사이 부쩍 수척해진 아빠를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올 준비를 했다. 금방 다시 오겠노라고 이야기하고 돌아서는 순간 아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듯하여 허둥지둥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다.

  처마 밑에 어제까지는 보이지 않던 거미줄이 눈에 들어왔다. 밤사이 거미 한 마리가 처마 밑에 집을 지어놓은 모양이었다. 나는 파리채에 맞아 처참하게 뭉개진 파리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 망설임 없이 거미줄에 올려놓고는 거미가 충분히 진동을 느낄 수 있도록 입김을 ‘후∼’하고 불어넣었다. 거미는 순식간에 파리에게로 달려들어 거미줄로 휘감기 시작했다. 그 순간 파리의 모습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와도 같았다. 그 거미가 어미를 잡아먹는 녀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내가 먹이 줄 테니 네 어미는 잡아먹지 마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가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 거미의 얼굴이 겹쳐 묘하게 뒤섞였다.

   “으악!”

나의 비명에 놀라 그가 움찔했다. 순간 나는 그의 얼굴에서 어미를 잡아먹는 징그러운 거미의 모습을 보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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