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일지
정치를 이해할 때의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여론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가 그 실체보다 훨씬 부풀려지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중요한 주제가 여론에서도 큰 반향을 얻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룬 납치 문제처럼 역사적 사건의 어느 한 쪽만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정권이 은폐하려고 하는 사실이 오히려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의견은, 식민지 잔재의 청산의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북일 국교 정상화가 일보 전진 일보 후퇴를 거듭한 까닭은 정권이 강조하는 일본인 납치 문제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아베 내각은 북한이 해결할 용의가 있는 납치 문제를 불가능한 추가 조건을 걸어가며 놓아둔 채로 그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독서 메모]
북일 예비 교섭을 통해 북한에 쌀을 지원하고 식민 지배를 청산하는 교섭을 맺었다. 이후 쌀을 지원하고, 모리 내각 하에서 북일 교섭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9차 북일 회담에서는 과거를 청산하고 배상하는 조건과, 과거에 대해 사죄 및 반성을 하되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으로 배상하고,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하자는 조건이 있었다. 이 중에서 후자로 합의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은 2001년 4월 26일 성립했다. 아베 신조는 관방부장관을 맡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지지하는 발언을 계속하면서도 임기 중 6번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부르는 등 북미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북한이 일본을 의지하도록 교섭을 진행하려고 했다. 미국의 압력과 일본 여론을 고려해서 비밀리에 진행했다. 책임자였던 다나카의 구상은 ‘북일 정상회담->미국 포함 6자회담->미국 및 한국 지지 북일 국교 정상화’ 였다.
북한은 일본인 납치 생존자 5명, 사망자 8명이라는 것을 알리고 납치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사망자 8명이 실제로 사망했다는 증거를 북한이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게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자 시민단체 ‘구원회’는 ‘사망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살아 있다는 것 아니냐, 그러니 귀국시켜라’ 라고 주장하였다(이런 주장을 총리로 취임한 이후 아베 신조도 받아들이면서 납치 문제는 논리적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북일 국교 정상화에서 더 진지하게 사과해야 할 쪽은 일본인데, 일본 국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도리어 북한이 더 잘못한 것처럼 여론을 조성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무렵 5명의 생존자가 일본에 일시적으로 귀국했는데, ‘가족회’는 “귀국하면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결국 5명은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는 일본의 신뢰도를 깎는 일이었다.
구원회와 가족회가 2002년 납치 피해자 전원 귀국을 주장하면서 “정부, 국민, 언론, 여론을 제압” 하였다. 와다 하루키는 “한번 권력기관이 은폐하겠다고 결정하면, 이를 밝히는 것은 일반적 수단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2005년 북일 교섭이 다다르게 된 것은 그와 같은 벽이었다.” 고 의견을 말한다. 북한이 사망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8명이 모두 살아있다고 전제하고 교섭을 하겠다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지는 않다.
북일 평양선언 이후 2005년 9월 19일 4차 6자회담이 이어지면서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된다.
당시 관방장관이던 아베 신조가 북한인권법을 제정한다. 2006년 9월 26일 아베는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그 직후 납치문제대책본부 제 1회 회의를 열어 1)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강화, 2)북한 비난 여론 강화/확대, 3)피해자 전원의 생환 실현이라는 정책(?)을 낸다.
이후 여러 차례 내각이 바뀌었지만 ‘3원칙’은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와다 하루키는 “납치문제대책본부는 간 나오토 내각에서는 유명무실해졌다”고 한다.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북한적십자가 10만 달러를 지원했으나 일본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노다 요시히코 내각은 국교 정상화 후 경제협력 협정을 조인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협의가 긍정적으로 진행되는 듯 했으나 아베의 자민당에 참패한 후 하야했다.
아베는 여전히 3원칙을 고수했으나, 어쨌든 교섭을 진행하는 방향을 취했다. 2014년 5월 29일 스톡홀름 합의를 했으나 북일 관계는 다시 냉랭해졌다(교섭 담당관이었던 송일호는 “일본이 북한의 납치 문제 조사 보고서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북미 대립도 심화되었다.
아베가 암살된 후에도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아베의 대북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납치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이 피해자 전원의 귀환이라는 명분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자민당은 전날 발표한 2024년 운동 방침안에서도 "모든 납치 피해자의 즉시 귀국 실현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력을 다한다"고 밝혔다. – 2024.3.6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