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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언제나 옳다.

기대, 실망, 어린이

by pearl pearl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아이들과 책을 읽은 뒤 그에 맞는 독후 활동을 하는 것이다. 연령은 4세부터 12세로 다양하여 활동의 차이는 있지만 내가 모든 연령에 빠짐없이 하는 것이 바로 '칭찬'이다. 시작은 사소한 칭찬으로 시작된다. 교실에 울지 않고 들어오는 것, 의자에 예쁘게 앉는 것, 책을 읽을 때 집중하는 것 등등.

칭찬을 받은 아이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부끄러워서 일부러 행동을 삐딱하게, 말을 퉁명스럽게 하는 아이와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아이들이 있다. sns를 하다 보면 종종 아이들에게 너무 많이 하는 칭찬은 독이 될 수 있다는 글을 많이 본다. 그 칭찬으로 인해 더 잘하려는 강박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칭찬을 많이 들은 아이가 커서 칭찬을 잘하는 어른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 잘하려는 강박이 나쁜가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누군가의 기대를 받는다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의 기대를 받지 않고 자란다면 무엇인가를 해냈을 때의 기쁨을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칭찬한다는 것은 나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어린아이들은 늘 누군가의 관심을 먹고 자란다. 그렇기에 칭찬은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필수 영양제인 셈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재밌지만 무서웠던 담임 선생님의 책상엔 항상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놓여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도 그 책의 표지와 이름을 기억하는 걸로 보면 그 선생님은 그 책을 꽤 오래 가지고 다니셨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4학년의 아이들이 마냥 예쁘게만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어떻게 서든 우리에게 칭찬할 만한 구석을 찾기 위해 그 책을 읽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실제로 선생님은 나에게도 사소한 칭찬들을 종종 해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의 나를 생각해 보면, 칭찬이 주는 무게보다는 설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내가 이걸 잘하는구나,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공존하였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러한 칭찬을 듣는 것이 어려웠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시절 설거지를 해놓고 아빠의 칭찬을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여기가 제대로 씻기지 않았네, 설거지는 찬물보단 뜨거운 물로 해야 잘 된다, 다음엔 뜨거운 물로 해라였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나는 아빠에게 내가 잘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보여줘 봤자 결국 돌아오는 것은 칭찬이 아닌 부족한 점을 콕콕 집어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글쓰기로 상장을 받을 때도 학교에서는 박수를 쳐주었지만 집에서는 '네가? 상을? 줄 사람이 참 없었나 보다.'라는 말을 듣고 더 이상 내 꿈은 자라지 않은 채 씨앗 상태로 흙속에 파묻혀버렸다.

칭찬을 바랐던 사람이기에 칭찬의 단점보단 장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무관심보단 기대감이 더 나은 나를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기대감도 심어주고, 실망도 시켜보고 그래야 다양한 감정을 다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난 아이들에게 사소한 칭찬을 많이 해주고 싶다. 칭찬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춤을 추게 만드니까. 오늘도 잘했어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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