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층 아파트에는 소아과가 없었다.

by 무심

코로나가 한창이던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아이들과 함께 경기도의 한 아파트 12층에 갇혀 있었다.

일 년의 절반을 가정보육으로 보냈다. 좁은 거실에서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보낸 그 시간은 우리 모두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그 생각이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알겠는데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코로나가 지나가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우리 가족의 하루는 여전히 쳇바퀴 같았다.

평일에는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아빠를 아이들은 주말에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양가의 도움 없이 홀로 감당해야 했던 몇 년간의 육아 기간은 내 안의 활기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어느 비 내리는 평일 오후였다.

학교 지킴이 일을 마치고 들어온 집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그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라 적막함에 가까웠다.

비에 젖은 거실 창밖으로는 무채색의 회색 아파트와 빌딩들이 서늘하게 서 있었다. 12층 베란다 아래로 보이는 빽빽한 주차장의 차들은 숨이 막힐 듯 답답해 보였다.

적막을 깨보려 유튜브를 켰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소음들만 허공을 떠 돌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걸까.' 답도 없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농어촌 유학'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4~5년 전 TV에서 본 귀농 귀촌 가족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꼴로 아팠던 도윤이를 데리고, 가까운 소아과 대신 먼 보건소를 이용해야 하는 생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그저 부러움으로만 끝났었다.

하지만 2024년의 겨울은 달랐다. 도윤이는 어느덧 일곱 살이 되어 병원 문턱을 넘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달라져 있었다.

소아과가 먼 것보다, 내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현실이 더 무서웠다.


'이거다!'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 농어촌 유학 갈래."

'이건 어때?'도 아니고, '이런 것도 있는데 애들이랑 해볼까?'도 아니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선언을 했다.

남편은 당황한 듯 되물었다. "그게 뭐야?"

열심히 설명했다. 어떤 프로그램인지, 왜 우리 가족에게 지금 이것이 필요한지.

설명을 다 듣고 난 남편의 첫마디는 이랬다. " 애들 데리고 혼자 괜찮겠어?"

10년째 독박육아를 하고 있었지만, 밤늦게라도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것과 아예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모양이다.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남편의 그 걱정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는 뜻이었다.

이사와 전학을 거부하는 아이들과 불안해하는 남편 사이에서 나는 한 발짝 물러서는 척 승부수를 던졌다.

"그럼, 캠프라는 것을 하는데 경험이라도 해보자."


2025년 6월, 우리는 전북 진안으로 향했다.

궁금증에서 시작한 캠프였다. 반신반의하던 남편은 적극적으로 지원서를 검토해 주었고, 장시간 이동에도 아이들은 씩씩하게 버텨주었다.

30명이 넘는 학급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백운초등학교는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잔디가 푸르게 깔린 운동장 한 편에는 아이들이 직접 가꾸는 텃밭이 있었다. 상추와 토마토가 자라고 있었다.

교실 안에는 책상뿐 아니라 작은 소파까지 놓여 무척 아늑해 보였다. 음악실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있었고, 컴퓨터실에는 아이들 수만큼의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학교 어디를 봐도 창밖으로 높고 푸른 산이 보였다. 12층 베란다의 회색 빌딩 숲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우리 부부는 학교를 구경하는 내내 "아이들이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를 연발했다.

"우리 집도다 더 좋은데?"

백운초 옆에 새로 지어진 유학타운 주거지를 둘러보면서 남편이 말했다.

주거지까지 모두 둘러본 우리 부부는 확신에 확신을 더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숙소에서 마주한 아이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엄마, 친구가 너무 적어. 다 합쳐서 3명이야."

왁자지껄한 교실에 익숙했던 4학년 도진이에게 3명뿐인 교실은 너무 조용했을 것이다. 6명이 전부인 1학년 교실을 경험하고 온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감탄했던 고요함과 여유가 아이들에게는 낯설었고, 우리가 아늑하다고 느낀 교실은 그저 심심한 공간일 뿐이었다.

우리 부부는 너무 좋았고 아이들은 여전히 별로였던 농어촌 유학 캠프였다. 하지만 적어도 가능성은 확인했다. 회색의 풍경보다는 저 푸른 산이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우리는 다시 짐을 쌌다.

이번에는 캠프가 아니라 '진짜'였다. 진안이 가능성을 확인한 곳이었다면, 영월은 그 가능성을 실제로 살아내는 실전이 될 터였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농어촌 유학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10년 동안 돌고 돌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영월의 첫날밤, 에어컨 바람에 섞여 훅 끼쳐온 그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나의 무모한 시도가 결코 낭만적일 수 없음을 알리는 서늘한 전조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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