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 트럭을 보내고 남은 짐들을 차에 꽉꽉 눌러 담고 나니 어느덧 오후 6시였다. 영월까지는 꼬박 3시간 거리. 지친 아이들을 뒷좌석에 태우고 서둘러 출발했다.
영월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뒤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을 지나, 우리가 한 학기 동안 살게 될 작은 펜션에 도착했다.
8월 17일. 강원도의 여름밤은 생각보다 습하고 더웠다. 펜션 문을 열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고, 우리는 서둘러 에어컨부터 켰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쿰쿰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에어컨 필터 사이사이 박힌 시커먼 곰팡이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다.
"아... 여기서 어떻게 살지? 망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오기 싫다는 아이들을 달래고, 남편을 설득해 가며 밀어붙인 영월행이었다. 중간중간 올라오는 불안감을 '가면 괜찮을 거야.'라는 주문으로 꾹꾹 누르며 진행해 온 터였다. 그런데 고작 이 쿰쿰한 곰팡이 냄새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런 나의 상태를 눈치챈 남편이 빨리 정리하고 자자며 서둘렀다. 아이들과 남편이 모두 잠든 뒤, 나의 불안감이 폭발했다. 내 고집으로 여기까지 따라와 준 가족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후회의 눈물이 마구마구 쏟아졌다. 훌쩍거리는 소리에 남편이 잠에서 깼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여기서 어떻게 살지?" "내가 내일 에어컨 다 청소할게. 걱정 말고 자."
무심한 그 한마디에 내 불안이 조금은 덜어졌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깊은숨을 내쉬며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일찍 도착했다. 하루 종일 먼지를 닦아내고 짐을 정리하고 나니, 펜션은 조금씩 살만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집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의 개학식 날 아침이 밝아왔다.
2025년 2학기, 옥동초등학교에서는 우리를 포함해서 총 10가 정의 농어촌 유학생들이 새로 왔다. 학교에서는 개학식을 마치 입학식처럼 크게 진행해 주셨다. 교장선생님은 전학을 온 아이들에게 일일이 꽃다발을 건네며 환영해 주셨다.
개학식 내내 큰아들 도진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둘째 도윤이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아이들이 각자 반으로 들어간 뒤, 학부모들은 차담회를 가졌다.
학부모 차담회가 열린 시간, 복도 유리문 너머로 아이들이 후다닥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쉬는 시간인가?' 싶은 찰나, 우리 집 둘째 도윤이가 친구들과 뒤섞여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녀석, 적응 하나는 끝내주게 빠르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에게 개학 첫날을 잘 보냈는지 물었다. "엄마, 복도가 미로처럼 구불구불해 보였어. 무서워서 그냥 교실에서 책만 읽다가 왔어."
도진이는 낯선 학교가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반면 도윤이는 신이 나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친구 생겼어! 그 친구랑 계속 놀다 왔어!"
같은 공간이었지만, 두 아이가 받아들인 학교의 첫인상은 이토록 달랐다.
누군가에게는 조심스러운 탐색의 시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신나는 모험의 시작이었다.
방과 후에 아이들은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엄마들도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고 펜션 사장님의 도움을 받으며 영월에서의 삶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유학 생활이 어느 정도 틀을 갖춰가던 때였다.
개학을 한 지 2~3주가 지났을 무렵, 도진이가 결국 터지고 말았다.
영월에 내려온 뒤로 도진이는 종종 "엄마는 나빠,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을 툭툭 내뱉곤 했다. 오기 싫어했던 아이의 마음을 알기에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나 여기 싫어! 엄마가 해보고 싫으면 다시 가도 된다고 했잖아! 당장 가자, 다시 원래 학교로 가자."
주말 오전 내내 이어지는 도진이의 징징거림에 결국 나도 폭발하고 말았다. 화를 내고 난 뒤의 마음은 참담했다.
도진이가 '내 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라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까 봐 겁도 났다. 도진이의 눈 깜빡임(Tic)이 더 심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마음에 돌덩이를 얹은 듯 무거웠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하지만 아이의 말대로 당장 짐을 싸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미안함과 걱정을 안고 도진의 곁을 묵묵히 지킬 뿐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영월에 온 지 한 달 쯤이 되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펜션 마당은 아이들의 배드민턴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처음엔 구경만 하던 도진이도 조금씩 라켓을 잡기 시작했고, 도윤이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펜션의 다섯 가족이 평상에 모여 간식과 밥을 나눠 먹는 일상도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게 모두가 평온함에 익숙해져 갔다.
한가롭기만 하던 어느 일요일 오후,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졌다.
펜션 평상 지붕 위로 올라간 셔틀콕을 꺼내려고 예준이 엄마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셔틀콕을 꺼내려던 찰나, 사다리가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사다리에서 떨어진 예준 엄마는 손을 크게 다쳤다. 아이들이 놀랄까 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수건 가득 피를 흘렸다. 재이 엄마가 급히 차를 몰아 응급실로 향했고, 남겨진 엄마들은 놀란 예준이와 울고 있는 예서를 달랬다.
불안해하는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이고 등을 도닥이며, 우리는 밤늦도록 연락을 기다렸다. 영월의료원에서 원주 병원으로, 다시 응급 수술로 이어지는 급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병원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이, 멀리에서 달려오신 예준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도착해 겁에 질린 아이들을 꼭 안아주셨다. 밤 10시가 넘어서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제야 펜션에 남아있던 엄마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각자의 집으로 흩어질 수 있었다.
예준이 엄마가 손에 커다란 붕대를 감고 돌아오기까지는 그 후로 3주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 비어 있는 시간 동안 우리는 예준이 엄마의 빈자리를 함께 채우며 이전보다 조금 더 끈끈해져 있었다. 다 같이 천문대에 가고, 마당에서 과자 파티를 열며 서로의 안부를 챙기는 일상이 이어졌다.
아찔했던 사고는 역설적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냥 한 학기 머물다 갈 시골 펜션인 줄 알았던 곳이, 어느새 우리를 든든하게 보호해 주는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 있었다.
적응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곰팡이 냄새 가득했던 첫날밤의 절망부터 응급실을 오가야 했던 아찔한 사고까지, 영월의 밤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시련들을 끊임없이 던져주었다.
우리의 선택이 정답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가족 모두가 이 낯선 땅에서 무언가를 배우며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 누구보다 마음의 문을 꽉 닫고 있던 도진이에게도 작은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불안하게 깜빡이던 아이의 눈꺼풀이, 영월의 깊은 숲 안에서 처음으로 고요하게 멈춰 서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