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라 Jan 04. 2021

맘충에 대하여 1.

성별이 여자이며 자녀가 있는 사람의 자리

큰 아이가 6살 즈음,

나는 아이와 함께 마트에 들렀다.

히 무언가를 사기 위해 간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구경도 할 겸, 시간도 때울 겸, 그러다 적당한 게 있으면 사기도 할 겸 겸사겸사 들렀다. 꼭 산다는 결심 없이 방문해서였을까. 나는 행여나 점원이 “들어와서 한번 입어 보세요” 라며 친절히 응대할까 봐 재빠른 걸음과 동시에 곁눈질로만 옷을 살펴보았다. 거절을 어려워하는 나는 그런 응대를 받으면 어김없이 사고 말 테니까...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꽤 성공적으로 표 나지 않게 쇼핑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점원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부담을 느낀 나는 점원이 더 가까이 오기 전에 매장을 벗어나기로 했다. 잰걸음으로 매장을 빠져나오는데,

그런데 옆이 허전하다. 너무나도 자유로운 내 걸음이 어색하다. 무언가 빠졌다.

우리 아이.


고개를 휙 돌려보니 아이는 여전히 그 매장 앞에 서서 마네킹이 입고 있는 흰색 원피스 자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점원의 시선은 이내 나와 아이에게 번갈아 꽂혔다.

학창 시절에 100미터 달리기 최고속도가 18초였는데 아이를 낳곤 능력치가 상승한 게 분명했다. 순식간에 정말 순식간에 나는 아이에게 달려가 옷을 매만지고 있는 아이의 손을 탁하고 내리치며 소리를 빽 질렀다.

“살 것도 아닌데 옷을 왜 만져!”

나는 점원에게 꾸벅 목례를 한 다음 한 손으로는 카트를 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이의 손은 더럽지 않았다. 아이의 손에 크레파스라든가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지도 않았다. 아이는 그저 예쁜 옷을 한 번 만져보았을 뿐이고 옷은 오염되지도 않았다.

사실 옷 매장에서는 누구나 옷을 만져본다. 사든 사지 않든 만져본다. 만져보아야 이 옷을 살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할 수 있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옷을 만진 아이의 행동 자체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보는 중에 아이의 손을 내리치고, 소리까지 지르며 무안을 주었을까.   



당시에 듣도 보도 못한 말이 들불처럼 막 번지고 있었다. ‘맘충’.

어린 자녀를 핑계로 진상을 떠는, 민폐를 끼치는 엄마들을 나타내는 말이라는데 어원(?)이 어찌 되었든 나중에는 어린 자녀와 해당 진상 짓에 인과관계가 없어도, 진상 떠는 자의 성별이 여자이며 그 자리에 자녀가 있으면 상관관계(?)에 의해 그도 ‘맘충’으로 불렸다. 아이를 핑계로 진상을 떨면 ‘엄마는 벌레’가 되었고, 아이와 상관없이 진상을 떨어도 자녀가 있으면 ‘엄마인 벌레’가 되었다.      



여자이며, 어린 자녀와 동행 중인 내가 무언가를 실수하거나 누군가의 눈 밖에 나면 나 역시 곧바로 엄마는 벌레, 혹은 엄마인 벌레가 될 위기상황에서 아이가 옷을, 그것도 흰 옷을 만졌으니 ‘나는 아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진상이 되었구나. 결국엔 맘충이 되고야 말았구나’ 하는 좌절감, 타인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 이런 상황을 만든 아이에 대한 원망, 내 잘못은 아닌데 하는 억울함 등이 마구 뒤섞여 아이에게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만 것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민폐를 끼치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며 진상을 떠는 것은 잘못된 행동임이 분명하다. 할 수만 있다면 고소하여 콩밥도 먹이고 더불어 욕도 실컷 먹이고 싶은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벌레처럼 하찮게 ‘라벨링’이 되지는 않는다.

청문회를 통해 각종 비리가 드러나는 정치인들에게 ‘정치충’이라 하지 않는다. 그저 해당 정치인의 잘못이며, 그래 봤자 ‘정치하는 인간들이 다 그렇지’ 정도다. 되지도 않은 성적인 말을 지껄이는 직장 상사에게도 ‘성희롱충’이라는 라벨은 붙지 않는다. 되려 상대가 ‘이런 사소한 농담조차도 넘어가지 못하는 사회성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히기 일수다. 학교는 어떤가. 또래를 괴롭히는 녀석들에게 벌레는커녕 ‘일진’ 이라며 1자를 붙여주기까지 한다.  정치인, 직장상사, 또래를 괴롭히는 무리들은 어떤 잘못을 해도 ‘벌레’로 라벨링 되지 않는다.

즉 나 보다 힘센 사람은 ‘나쁜 사람, 진상’으론 불릴지언정 ‘벌레’로 불리진 않는 것이다.      



우리는 ‘맘충’이 무언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맘충으로 불리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우리는 정녕 재벌이 수십수백억 탈세를 하고, 정치인이 갖은 비리를 저지르고, 깡패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때리고 죽이는 것보다 음식점에서 아이를 위해 따뜻한 물을 요구하고, 아이의 기저귀를 테이블 밑에 숨겨두고, 큰 소리로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것이 더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미 우리에게는 ‘진상’, ‘나쁜 사람들’, ‘쓰레기 같은 행동’이라는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맘충’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창조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만만한 집단을 하나로 묶고 라벨링 하고 보다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다.

(비슷한 맥락으로 급식충, 딱이 있는데  급식은 성인들도(회사에서) 먹지만, 이때 일컬어지는 급식충은 학교 급식을 먹는 학생을 일컫는다. 경제적 자립이 되지 않았고 투표권도 없는 미성년자는 성인과 같이 급식을 먹어도, 급식‘충’인 것이다. 딱 역시 힘없는 노인의 의견은 그저 틀니를 딱딱대는 소리로 묵살될 뿐임을 알 수 있다)     



그 날 누구도 나에게 맘충이라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지레 내 소중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때렸다.

옷가게에 가서 옷을 만져보지도 못했고, 놀이방이 없는 식당엔 방문하지 않는다. 혼자라면 넌지시 해 볼 수도 있는 온수 요청을 아이와 함께라면 요청하지 않는다.

남들은 큰 소리로 대화하지만 우리 아이는 음소거로 애니메이션을 봐야 한다.


활동 공간이 제한되고, 활동 내용이 제한된다.  

이미 통제권 안에 들어 선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벌레’라고 부르고 있을까

우리에게 누군가를 벌레라고 부를 ‘자격’이 있을까

그런 발언권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성별이 여자이며, 아이가 있는 사람의 위치는

이 사회의 어디쯤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