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살을 시작하고부터 나는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마주했는데
그 느낌이 뭐랄까. 김피탕?!
김치, 피자, 탕수육
모두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인데
이걸 섞어 한꺼번에 '김피탕'으로 먹자니
'엥? 진짜로? 이것들을 콜라보한다고?' 싶은
뭐 그런 당혹감이랄까 놀라움이랄까.
여하튼 다 아는 건데, 너무나도 잘 아는 건데
초면 같은 그런 거.
그런 기분에 자주 잠식되곤 했는데
사실 뭐 때문인지는 몰랐다.
익숙하면서도 불편한 이 감정의 출처를 모르니
사실 그리 달갑지는 않았는데
드디어 이 감정의 출처를 출석 6번 만에 알아냈다.
야호.
이 김피탕 같은 감정의 근원은 바로,
아라씨,
아라시아라시아라씨,
아아아아아아아~ 아라씨,
아~ 아라씨
아!롸! 씨!
땡큐 아라씨!
_였던 것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체적 유능감이 떨어진다는 말에 힘입어 시작한 풋살에서 신체적 유능감이 아닌 유능함이 떨어진다는 것이 연습경기를 통해 확실시되어가는데
경기만 하면 유독 내 이름이 많이 불린다는 거다.
바로 이렇게!
패스를 받으라고 부르는, 아라씨
패스를 달라고 부르는, 아라시아라시아라씨
내가 공을 죽어라 따라갈때 부르는,
아아아아아아아~ 아라씨
기회도 놓치고 공도 놓쳤을 때 부르는,
아~ 아라씨
어리바리 엉망진창 넋 놓고 있을 때
부르는 분노의, 아!롸! 씨!
그리고 이런 나를 보며 고마워하는 상대팀의,
땡큐 아라씨!
나는 내가 다양한 아라씨로 불릴 때마다
김피탕 느낌에 잠식되고 있었던 거다.
그게 왜, 그게 뭐라고?
아라 맞잖아. 조아라.
두 해 전,
아이의 친구 엄마와 전화번호를 교환하던 때가 떠오른다.
번호를 받아 누르며 나는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때 그 아이의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지
....네? 제 이름이요?
그녀는 이름을 말해본 적이 오랜만이라며
멋쩍은 듯 웃었다.
당시 나는 전업주부이신지라 그럴 수 있겠다
정도로 생각했다.
근데 이제야 보니
나 역시 최근 10년간 내 이름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9할을 조아라 강사님, 아라쌤으로 불렸고
나머지 1할을 00이 어머니나 '야야(며느리, 새아가를 부르는 경상도식 별칭)로 불렸다.
나는 주욱 내 역할로 불렸을 뿐
나라는 존재 그 자체로
'조아라' 로 불렸던 적은 없었던 거다.
아, 내가 풋살장에서만큼은
강사도, 누구 엄마도, 누구 며느리도 아닌
그저 조아라로 불리는구나 깨닫고 나니
그 낯섦에 코 끝이 아려왔다.
순식간에 김피탕에 고추 냉이까지 추가해버린 격이다.
김피탕을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데
의외로 후기는 찬양 일색이다.
그 익숙하고도 낯선 맛이 환상이란다.
내 이름은 조아라.
그저 조아라라는 존재로는
10여 년 만에 다시 불리는 중이다.
우리 동네에도 김피탕을 파는 식당이 있을 까
다시 불리는, 다시 존재하는 조아라를 위하여
오늘은 김피탕을 먹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