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교실에서 성행위에 대해 말하고 흉내까지 내는 일이 발생했으니 성교육을 해달란 말과 함께였다.
날짜도 임박한 걸 보니 학교 측이 어지간히 다급한가 보구나 싶었다.
강의 준비를 하며 제일 우선에 두었던 점은 교실 구성원 모두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강사의 입에서 청중의 귀로가 아닌, 우리들의 입에서 우리들의 귀로 그리고 피가 온몸을 한 바퀴 돌 듯 결국엔 그 말들이 가슴께 닿아 무언가 울림을 주는 교육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우산을 받쳐 들고 20분 거리의 문구점을 걸어 포스트잇을 사 오는데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비는 교육 당일에도 그치지 않았다.
흐리고 짙은 날씨 탓에 학생들도 축축 처지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가리가 없다.
성폭력의 정의와 유형에 대해 설명한 후 '만약 우리 반에 이러한 언행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우리 학급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작성해보자고 했다. 학급의 모든 학생에게 포스트잇을 나누어 준 후 익명으로 적고 칠판에 붙이도록 안내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자신의 의견을 작성하고 칠판에 공유했다.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는 동안 집중도도 꽤 높았다. 한두 명 즈음은 '재밌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웬걸 단 한 명도 그러지 않았다. 불쾌하다, 한심하다, 왜 저렇게 살까, 역겹다 는 말들이 주를 이루었고, 그러한 언행으로 인해 학업에 방해가 된다,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진다, 따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등의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원하지 않는데 성적표현물을 보여주거나 흉내 내거나 언급하는 것, 동의 없이 타인의 신체에 접촉하는 것, 친밀감을 이유로 친구의 성적 사생활을 캐묻는 것은 멋지고 재밌고 어른스러운 행동이 아니라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성폭력 행위일 뿐이다_라고 정리했다.
강사의 입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라 교실이라는 공간과 학생이라는 역할을 공유하는 친구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여서인지 떠들고, 장난치고, 강사의 말꼬리를 잡던 학생마저도 이 활동 후에는 눈에 띄게 그러한 행동이 줄어들었다. 성폭력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이 이런 자신의 행동마저 속으로는 '한심하다, 역겹다'라고 여길까 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새삼 '집단의 암묵적 분위기'라는 것이 얼마나 힘이 센가를 느꼈다.
즐겁고 재미난 수업은 아니었지만, 얼마간의 의미를 준 나름 성공적인 수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 학생들한테 쪽지를 나누어주고 성에 대해 궁금한 것을 적으라고 했어. 그 이야기들을 토대로 오늘 강의를 했어. 자던 학생들도 일어나고 종이 치니까 박수까지 쳐주더라"
함께 강의를 한 선배 강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쪽팔림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학생들이 성행위에 대해 언급하고, 교실에서 흉내 낸다'라는 학교 측의 말을 나는 '또래 성폭력'으로 인지하고, 그러한 행동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불쾌감을 주는지 또한 그러한 언행이 얼마나 찌찔한 것인지를 직면하게끔 교육을 구성한 반면, 선배 강사는 이를 '성에 대한 관심'으로 인지하고 오히려 학생들이 성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말하고 싶은 것을 '전문가'와 함께 '교실'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말할 수 있도록 교육을 구성했던 것이다.
'서로 간의 관점 차이'라고 자위하기엔 평소 내가 떠들어제낀 말들이 있어 양심상 그러지도 못했다.
"청소년이 주체가 되는 성교육의 필요성"을 그간 얼마나 침 튀기며 말해왔던가.
며칠 전 엄마께 이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엄마, 나 요즘 먹고살만한가 봐 요즘 내가 쓰는 글들은 너무나 뭉뚱뭉뚱해. 하나도 예리하지 않고 모두 너무 무디었어. 글을 쓰는 게 겁이나"
그런데 오늘 나는 나의 무딤이 글뿐만이 아녔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아니, 순서가 바뀌었다. 글이 무디어진 게 아니라 내가 무디어져서 글도 강의도 무디어진 것이다.
그 생생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왜 발견해내지 못했을까. 그 정서를 충분히 다루고 이후에 경계만 잘 그었어도 좋았을 것을, 나는 오늘 내가 제일 싫어하는 '금지' 팻말만 세우고 왔다.
그것도 치사스럽게 청중의 입을 빌어서.
박수 받지 못한 오늘 나의 강의, 마땅하고 마땅했다.
오늘 나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즐거움'을 놓쳤다.
입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