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빛과 색채에서 미의 본질을 찾다 - 오지호

by 밤과 꿈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마음속으로 들어올 때 그 대상은 자연과는 다른 자연이고, 그런 인간 심경의 작용이 창작의 본능이 된다."


해경, 캔버스에 유채, 1974년


화가 오지호는 인상주의의 토착화를 필생의 과업으로 알고 작품 활동을 한 화가로 기억된다.

그런 오지호의 미술 수련기에 대한 정확한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그림을 접하고 졸업 후에 동경미술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에는 중앙 화단의 등용문으로 가장 권위가 있었던 '조선미술전람회'를 외면하고 1928년에 김주경 등과 함께 진보적, 민족적 미술 모임인 '녹향회'를 결성, 한국적인 미술에 대한 구상과 구현에 몰두했지만 두 차례의 전시회를 끝으로 일본의 탄압으로 해산하게 된다.

이후 1935년에는 김주경과 함께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을 출간하면서 화집 속에 '순수 회화론'이라는 비평문을 수록하여 인상주의의 토착화를 실제 그림으로 구현하고자 애쓰는 한편, 그 이론적인 기반을 튼튼히 했다. 또한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개성에서 미술 교사로 지내면서 남겼던 작품 중 하나로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남향집'(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을 보면 오지호가 어떻게 인상주의 화풍을 전개시키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그가 인상주의를 받아들였던 일본의 인상주의가 습윤한 일본의 풍토를 반영한 것이었다면 오지호의 그림에서 인상주의는 보다 밝은 색채의 사용으로 청명한 한국의 자연과 대기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와 뜻을 같이했던 김주경이 해방 공간에서 월북했지만 오지호는 이후로도 인상주의 화풍을 유지, 인상주의를 한국의 풍토에 맞게 토착화시켰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오지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생각을 변함없이 지속시킨다.

이와 같은 인상주의에 대한 오지호의 확고한 경도는 1956년에는 조선일보에 미적 대상에 대한 '데포르메(deformer) 론'을 기고하게 했고, 1959년에는 추상미술을 비판하는 '구상회화 선언'이라는 글을 써, 서양화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오지호의 반골 기질은 유전적인 것으로 그의 부친은 구한말 전라남도 화순의 군수로 재직하다 오지호의 나이 5살 때인 1910년의 한일합방 때에 자결한 사람이었다. 화가로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조형세계를 지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글학자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과 자신에 대한 세평이나 명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앙 화단을 떠나 일찌감치 광주 무등산 자락에 정착했던 것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조선대학교에서 호남이라는 지방 화단을 형성할 후진을 양성해온 오지호는 영남 화단의 전혁림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 계간미술의 재조명을 통해 비로소 미술적 성과에 어울리는 명성을 얻게 된다.


1970년대에서부터 작고한 1982년까지의 오지호의 그림은 그가 지속해서 천착해왔던 인상주의 화풍이 완성되는 시기로 활달한 붓놀림에 의한 마티에르 효과로 표현주의적 양식을 가미하고, 대상을 과감하게 단순화하는 한편, 절제되고 자유로운 색채 처리로 화면을 재구성, 생기를 더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536호로 지정된 '남향집'이 작품성과 그 가치로 보아 오지호의 대표작으로서 부족함이 없지만 창작 후반기의 성과 또한 큰 것이기에 이 그림을 선택했다.

다만, 활발한 창작열에 의해 이 시기에 그려졌던 수많은 그림, 즉 해경이나 설경과 같은 풍경화나 정물화들에서 일정하게 그의 조형적 특징이 나타나 있어 어느 하나의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도 미의 본질을 자연 속의 빛과 색채에서 찾고, 이를 회화의 순수성으로 파악하고 주장한 화가 오지호의 조형 세계를 경험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