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화가를 다루고 있는 책 속에서도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이름을 찾기 어렵다. 그 이유를 추사가 직업적인 화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공재 윤두서, 현재 심사정, 표암 강세황과 같은 문인화가와 겸재 정선처럼 다양한 활동을 보인 양반 출신의 화가가 있어 왔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추사에게 있어 그림은 그의 학문이나 글씨에 비해 덜 주목받는 분야였고, 추사와 같이 선비가 그리는 문인화라는 것이 선비들의 여가를 채우는수단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아무래도 뛰어난 기량을 지닌 전문 화가의 그림에 비해 소박하면서도 아취가 가득한 것이 전문성을 찾기에 어려움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의 그림을 언급하는 것은 추사의 문인화가 지닌 높은 격조가 이후의 문인화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고, 추사가 그린 문인화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세한도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서 9년간 유배되어 고난에 찬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시절에 탄생한 그림이다. 비단 세한도뿐만 아니라 기름기가 빠지고 글자의 골기 만이 꿋꿋한 추사체의 완성 또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다산(茶山) 정약용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한 것처럼 추사가 유배지인 제주에서 자신의 글씨를 완성했으니 흥미로운 사실이다.
추사는 이조판서를 지낸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박제가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중국을 드나들면서 선진 문물을 접하며 그의 나이 55세 때에는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지만 안동 김 씨의 득세와 함께 유배를 떠나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위리안치라는 가장 가혹한 유배형에 처해진 추사는 외로움과 질병, 그리고 유배 중에 아내의 부고를 접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지인의 도움 또한 없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추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며 역관이었던 이상적의 도움으로 추사는 중국에서 나온 서책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세한도는 바로 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그림의 왼편에 쓴 발문에서 추사는 공자의 논어에서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라는 글을 인용, 자신의 처지가 곤궁해졌음에도 자신을 대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는 이상적에 대한 사제지정(師弟之情)을 표현했다.
물기가 거의 마른 갈필(渴筆)로 그려진 그림은 추사의 글과 마찬가지로 선비의 강단 있는 골기가 느껴지고, 꾸밈없이 간결한 그림에서 선비의 올곧은 성정을 보는 듯 감동적이다. 또한 집의 전면에 나란히 그려진 소나무와 잣나무의 자태가 추사 자신과 제자 이상적의 서로에 대한 마음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혹자는 곧게 뻗은 잣나무가 이상적을 나타내고 휘어진 노송은 추사 자신을 표현했다고 말한다. 거의 틀림이 없겠지만 꼭 그렇게 해석할 이유는 없을 듯싶다. 본래 잣나무는 곧게 자라는 나무이고, 소나무는 휘어서 자라는 나무다. 그리고 간략하게 묘사된 집은 창의 모양으로 보아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집으로 젊어서 추사를 제자로 삼아 가르침과 함께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내려준 중국의 스승 완원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의 뜻을 담은 것이라는 역사학자 조경철의 해석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세한도에서 김정희는 '완당'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한편, 이 그림과 함께 정갈하면서도 뼈대 있는 추사체의 발문이 주는 감동을 빼놓을 수 없다.
추사의 나이 59세에 탄생한 이 걸작은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개인이 소장해오다 작년인 202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어 진적(眞迹)으로 접할 기회가 많아졌으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