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民畫), 익명으로 남겨진 또 다른 감성

by 밤과 꿈


책거리(冊架圖), 종이에 채색, 조선시대 후기


민화를 우리 민족의 풍속과 생활 감정이 담긴 생활 그림으로 볼 때 민화는 일종의 민속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민속이라는 용어에 세련되지 못한, 소박한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면 민화를 민속화와 동의로 정의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면이 존재한다.

우선 민화를 그린 생산자에 대한 문제를 살펴본다면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개개의 민화를 평가할 때 민화마다 회화적 완성도의 편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반드시 정규의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의 화가에 의해서만 민화가 그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같은 도상의 그림이라도 엉성한 화면을 드러내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짜임새 있는 화면 구성이 전문 화가에 의해 그려졌음을 짐작케 하는 그림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민화가 반복 재생산되는 공예품처럼 그린 이의 익명성을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도화서 화원이나 도화서를 나온 전문 화가도 화가로서의 명성에 거리낌 없이 수요에 따라 민화를 그렸으리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민화가 단순한 공예품의 수준에 머물고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같은 도상의 그림일지라도 각각의 그림에 개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소비적인 측면에서 민화의 수요가 조선시대 후기에 접어들면서 급증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의 후기에는 상업의 발달로 양반이 아니라도 부를 축적하게 된 상인 계층의 영향력이 증대했고, 상인 계층이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몰락한 양반으로부터 집안의 족보를 사는 등 견고하던 신분제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에 따라 비록 대가의 품격 높은 그림을 소장할 수는 없었겠지만 격상된 신분에 어울리는 사치품의 수요가 증대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민화는 전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허영의 산물로서의 의미 또한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민화인 '까치호랑이(鵲虎圖)의 경우 새해에 집 대문에 붙여 액운을 몰아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림으로 목판화로 제작될 만큼 수요가 많았지만 일반 서민의 집에서 이를 사용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책거리(冊架圖)는 양반의 사랑방을 장식했을 그림으로 문맹인 일반 서민에게는 필요가 없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겨우 가짜 양반의 허세에 필요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화조도(花鳥圖)는 양반네의 안방을 장식했던 그림이었다.

조선 민화의 밝고 해학적인 모습을 언급하면서 조선의 사회상에 대하여 "한 맺힌 계급 사회는 아니었다"라고 말한 학자가 있었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단편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민화의 소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다양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화조도, 어해도(魚蟹圖), 까치호랑이, 십장생도(十長生圖)와 같이 동식물을 소재로 한 것과 산수화, 고사성어에 나오는 글자를 그림으로 디자인한 문자도(文字圖), 책거리뿐만 아니라 무속화와 불화와 같은 종교적인 그림에까지 민화의 범위를 확장하면 민화의 특징을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사랑받는 한편, 외국에서도 주목하는 민화의 매력을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민화는 이해하기가 쉽다. 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그림인 만큼 당연한 말일 것이다.

둘째, 그림이 솔직하다. 민화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민화의 소재가 다양하지만 그 목적이 뚜렷한, 실용적인 그림이다.

셋째,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 해학이 있다. 이런 것은 우리들이 볼 때 그림에서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외국인이 볼 때에도 이국적인 감성으로 작용할 것이다.

끝으로 위의 세 가지가 어울려 의외로 민화에서 현대적인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화가 지닌 이러한 매력 때문에 민화에는 그 특성을 단정 지어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민화라는 용어가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화를 정형화된 주류 미술과는 다른 가치를 지닌 그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