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檀園), 병진년화첩에 이 땅의 서정을 담다

by 밤과 꿈


"달밤에 낚시하며 구름에 밭을 가니 한가한 이의 생활이요, 밭에 오이를 심고 김을 매니 농부의 생활이로다"


'도담삼봉도(嶋潭三峰圖)', 종이에 수묵, 1796년 경


우리의 옛 화가 중에서도 단원 김홍도(1745~ ? ) 이상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화가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원이 그린 씨름 경기나 서당 등의 풍속화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친숙한 이미지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속화 영역에서 보여준 단원의 역량은 화가로서의 단원이 가진 재능과 성과의 일부분일 뿐이다. 물론 풍속화가로서의 단원의 위치와 그가 그린 풍속화의 가치는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지만 화가로서의 그의 진가는 금강산이나 단양의 절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와 화조화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단원의 화가로서의 성과는 몇몇 장르에 국한되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단원은 다양한 면모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의 단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못 그리는 것이 없다. 인물, 산수, 신선, 꽃과 과일, 동물, 물고기와 게 등의 그림이 모두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 옛날의 대가와 비교해도 그에 필적할 자가 없다."


이러한 단원의 다양한 역량은 우선은 그가 도화서 화원이었다는 사실에서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가 모든 부분에서 최고의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천분이 큰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단원은 7~8세의 어린 나이에 문인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표암 강세황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토록 어린 단원을 표암이 제자로 받아들인 것만 봐도 단원의 재능은 타고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0대의 나이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고, 29세의 나이로 어용화사가 되어 영, 정조 임금의 초상화를 그렸다.

어용화사로서의 두터운 신임으로 단원은 48세 때 도화서를 떠나 연풍현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1795년 다시 도화서의 화원으로 복귀한 후 정조가 죽은 1800년까지가 화가로서의 단원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49세의 젊은 나이로 정조가 급서 하자 조선 후기에 꽃 피웠던 문화는 서서히 시들기 시작했고, 단원의 그림도 이를 따라 전성기를 지나가게 된다. 말년에는 시골에서 전원을 벗하며 살았지만 경제적인 곤궁 속에서 쓸쓸한 만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질 뿐 정확한 사망 시기도 알려져 있디 않다.

이것은 겸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 정조 때의 문화 부흥기가 있었기에 단원과 같은 대화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는 영조 때의 겸재나 영, 정조 때를 함께 활동한 단원과 같은 대가를 품을 수 있었던 그 시대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병진년화첩'은 단원의 전성기였던 1796년에 화첩의 형태로 엮은 그림 모음으로 이를 통해 옥순봉이나 도담삼봉 등과 같은 단양 8경의 진경산수와 함께 시정이 넘치는 화조화 등 단원 그림의 진수를 경험하게 된다.

겸재와 비교할 때 겸재의 산수화가 힘이 넘치고 과감한 생략으로 주관적이라면, 단원의 그림은 겸재에 비하여 필선이 섬세하고 보다 진경에 가까운 산수를 그렸다. 이는 두 화가가 모두 그렸던 금강산의 총석정 그림을 비교해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겸재의 그림이 담대하다면 단원의 그림은 다분히 감성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단원이 그린 화조화가 보여주는 맑은 시정의 정취는 일품이다.


단양의 도담삼봉을 그린 '도담삼봉도'를 보면 겸재의 '금강전도'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바라다보는 부감법을 적용, 시야를 시원하게 확보하면서 삼봉을 화면의 중앙에서 사선으로 배치하여 그림에 동세를 주었다. 섬세한 필선으로 원경을 아련하게 그려 그림에 운치를 더했다. 그리고 오른쪽 하단의 도담삼봉을 구경온 듯한 갓을 쓴 양반과 벙거지를 쓰고 말을 끌고 있는 하인의 모습이 그림의 사실성을 더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단원의 그림으로 정겨운 풍경을 그린 '강마을'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 또한 '병진년화첩'에 수록된 그림으로 평범한 마을을 배경으로 다리를 지나 강을 건너는 나무꾼과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모습에 더하여 소의 등짝에 올라타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다.

이처럼 이 땅의 평범한 풍경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었던 단원을 두고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단원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고 표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