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이미지와 위작(僞作) - 전(傳) 신사임당

by 밤과 꿈


"묘한 생각과 기이한 솜씨를 따를 이가 없다."


8폭 초충도 중 '수박과 들쥐', 종이에 채색, 18세기(?)


위의 글은 조선 전기의 학자 양곡 소세양이 신사임당(사임당의 생존 시에는 동양 신 씨로 표기)의 산수화를 본 느낌을 시로 쓴 일부이다. 신사임당(1504~1551)의 산수화에 대한 예찬은 소세양뿐만 아니라 정사룡, 정유길 등의 글로도 남아있으니 신사임당이 활동했던 16세기에 신사임당의 그림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조선 전기의 최고 화가였던 안견(몽유도원도를 그림)의 화풍을 터득하여 안견과 견줄 만한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니 그 재주와 명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지간한 재주로는 남녀의 차별이 엄연했던 시대에 그런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든 일일 것이다.

또 한 가지, 기록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산수화와 포도 그림에 능했다고 한다.

또한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가 등과를 하지 못해 가세가 넉넉지 못한 가운데 신사임당의 그림으로 가계를 꾸렸다는 아들 율곡 이이의 글이 남아있어 당시에 신사임당의 그림이 인기가 많아 이를 소장한 집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산수화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작품이 없고(발문과 인장으로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짐작되지만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그림을 확인할 수 없는 산수화 1점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포도 그림과 초충도(草蟲圖)들마저 그 진위를 자신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이해가 되지 않는 의문점은 그 유명했던 신사임당의 산수화는 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신사임당 생존 당시에는 언급조차 없었던 초충도는 어떻게 갑자기 등장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율곡 이이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학문적 위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율곡이 사후에 성리학의 거두로 추앙받으면서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동양 신 씨의 명성보다는 율곡이라는 대학자를 키워낸 훌륭한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면모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17세기 성리학의 거물인 송시열이 신사임당의 산수화에 대하여 위작이라는 판정을 내림으로서 신사임당의 산수화가 사라졌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송시열이 생각하기에 여성이 그린 그림에 사대부들의 발문이 더해진 것이 못마땅했고, 율곡의 자애로운 모친에 평가를 집중하기 위해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폄하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산수화를 폄하하는 대신 그녀의 묵란도(墨蘭圖)에 발문을 써 산수화에 지해 소품이라고 할 수 있는 초충도를 전면에 부각하게 된다. 그런데 송시열이 난초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발문을 더한 그림은 사실 원추리와 나비를 그린 것으로 이 '원추리와 나비'는 현대에 들어 KBS TV의 진품명품 프로를 통해 갑자기 등장, 지금까지 전하는 신사임당의 유일한 진품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신사임당의 초충도 그림은 16세기에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를 모방해 18세기에 그려진 위작으로 생각된다. 그림에서 16세기 양식적 특징의 흔적이 있어 신사임당이 생전에 초충도를 그렸다는 것은 사실이며, 18세기에 들어 초충도가 유행, 수많은 모작을 양산시켰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간송미술관, 오죽헌시립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초충도의 진위가 의심스럽지만 회화 양식 상의 가치가 덜하지 않아 전 신사임당의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18세기에 초충도, 또는 화조영모도(花鳥翎毛圖)가 유행함에 따라 겸재 정선도 이를 소재로 그림을 남기고 있는 '수박과 들쥐'는 패랭이꽃 주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배경으로 수박을 파먹고 있는 두 마리의 들쥐와 수박을 그린 것으로 쥐가 옛 그림에서 재물을 상징하는 데다가 씨가 많은 수박과 짐승의 털을 그린 영모도가 자손과 집안의 번성을 뜻하는 것으로 한 집안의 풍족과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진위가 의심되는 모작일지라도 조선 민화와 함께 우리 옛사람들의 생활 정서가 잘 나타난 그림으로서 느끼는 정감이 실로 남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