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로(1904~1989)는 우리 미술사에서 아직 채워지지 않은 이름이다. 그 말은 그의 예술이 미완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예술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고암의 예술적 역량과 성과보다는 정치적인 역학 관계가 오랫동안 그에 대한 평가를 유보케 했던 것이었다.1967년의 동베를린 사건으로 구속되어 자유 없는 시간을 보낸 뒤 마음의 상처와 함께 고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일생이 그의 예술에 대한 평가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그가 부인인 박인경과 함께 백건우, 윤정희 부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마저 있어 사건 당시에 비해 정치적인 상황에 변화가 어느 정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미술사에서 그의 자리를 합당한 위치에 마련하고 있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기도 하다.
사실 고암 이응로는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과 함께 1950년대에 우리의 전통 회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대표적인 화가였다. 청전과 소정이 전통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화풍을 구축했었다면 고암의 그림은 화법과 소재의 혁신을 통해 세 사람 중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참신함을 가지고있었다.
이후 고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도 그의 실험 정신과 거침없는 창작열은 화풍의 변화를 거듭, 콜라주와 같은 서양화 기법을 실험하는가 하면 서예에서 창안한 문자 추상 등 추상 회화에 경도하게 된다.특히 1980년의 광주시민항쟁 이후 고암은 화면을 단순한 검은 먹으로 그린 인간 군상으로 채워가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가 그린 인간 군상을 보면 아마도 민중을 의미할 사람의 무리가 해방의 춤을 추는 듯도 하고, 어깨를 맞댄 군상이 그들을 억압하는 세상에 대하여 항거를 하는 듯도 하다. 고암이 이와 같은 형상에 도달한 것은 자신에게 가해졌던 정치적 핍박과 상처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고암이 1980년에 그린 '수덕사'라는 그림도 산수라는 전통적인 소재의 그림이지만 청전과 소정의 그림에 비해 단순화된 화면이 얼마나 현대적인 감각이 넘치는 그림인지를 수긍하게 된다. 수분이 많은 발묵으로 먹의 번지는 효과를 잘 살린 이 그림에서 반추상을 거쳐 추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고암의 의도가 보이기도 한다.
예술가로서 고암이 보여준 실험정신과 업적은 아직은 온전히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 현대 미술의 가장 빛나는 성과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