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老境)에서 도달하는 완고한 노교수의 회심(回心)

by 밤과 꿈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은 구 소련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감독과 함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영상으로 추구한 감독이었다. 따라서 두 감독의 영화 모두 지극히 어렵고 접근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롱 테이크의 장중하면서도 조금은 지루한 타르코프스키의 영상보다는 베리만의 영화가 좀 더 나 자신의 취향에 맞았던 것 같다. 물론 베리만이 추구하는 영상이 타르코프스키의 영상에 비해 이해하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신의 존재와 구원, 인간 실존과 갈등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베리만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난해함은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보다는 베리만의 영화가 친밀하게 느껴진 것은 그의 영화가 좀 더 극예술의 문법에 접근해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잉마르 베리만은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함께 인형극단을 조직했고, 스톡홀름 대학에서는 문학과 미술사를 전공, 젊은 시절을 소설과 희곡을 쓰며 연극과 오페라 무대에서 보냈다. 따라서 베리만은 영화 이전에 연극과 오페라 무대의 연출에 충분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그의 영화 또한 주제와 영상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플롯이나 배우들의 연기와 같은 극예술의 문법이 안겨주는 미덕을 잃지 않는다. 베리만 영화에 있어 마치 소극장의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것처럼 집중력 있는 앙상블 연기가 펼쳐지는 실내악적인 영화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자신이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마치 사진 예술을 경험하듯 롱 테이크로 정교하면서도 찰나적인 영상을 추구한다. 따라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주제와 함께 뛰어난 영상미가 두드러지지만 영화 속 배우의 연기가 그다지 비중 있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베리만과 타르코프스키는 대중 예술인 영화를 보다 심오한 영역으로 이끈 작가주의 감독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의사로 평생을 살아온 78세의 노교수 아이작 보르그(빅토르 쇠스트렘 )는 룬트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마침 시댁에 머물고 있던 며느리 마리안느(잉글리드 튈린 扮)와 함께 자동차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의사로서의 명망은 높았지만 인간적으로는 지극히 냉정한 사람이었던 아이작은 그의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자신의 아들인 에발드(군나르 비에른스트란드 扮)와 며느리인 마리안느에게도 상처를 주며 살아왔다.

따라서 아이작과 마리안느가 동행하는 여행이 결코 유쾌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 아이작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불길한 꿈마저 꾸었던 터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돌보아 온 가정부로부터, 그리고 여행을 떠나면서 며느리인 마리안으로부터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힐난을 받게 된 아이작은 전날 꾸었던 불길한 꿈을 떠올리며 자신의 일생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두 사람의 살갑지 않은 여행에 세명의 젊은이가 합승을 하게 되고, 그중에서 젊은 시절에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 같은 이름을 가진, 쾌활한 성격의 처녀 사라(비비 안데르손 扮)를 통해 자신의 젊었을 때를 회상하게 된다.

이들 세 젊은이와 또한 자동차 고장으로 잠깐 합승했던 진정한 사랑이 없이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을 통해 아이작은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이작은 여정의 중간중간 꿈을 꾸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아이작은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로 도피하면서 지금과 같이 완고해지기 전의 자신을 만나게 된다. 산딸기가 많이 자라던 어릴 때 살던 집 주위에 이르러서는 서로 사랑했지만 자신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형인 지크프리트와 결혼한 첫사랑 사라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한편,

형편없었던 어릴 때 학교 졸업시험의 경험이나 아내의 간음을 몰래 훔쳐보았던 경험과 같은 아이작의 내면에 숨어있던 과거를 꿈의 형태로 만나면서 사랑이 없는 부부생활로 불행하게 살다 쓸쓸하게 죽어간 아내를 떠올리고 자신이 의사로서는 훌륭한 삶을 살았지만 한 사람의 아내로서, 아버지로서는 실패작이었음을 서서히 깨달아 가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삶이 실패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아이작은 꿈속에서 검사에게 자신의 삶을 반성하면서 처벌을 간청하는데 검사로부터 고독이라는 벌을 받게 되는데 이는 완고하게 다신 만의 삶을 살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아이작의 미래에 대한 경고였던 것이다.

룬트에 도착할 즈음에 아이작은 자신의 잘못을 아들 부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타인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산딸기'는 인간의 실존이나 신의 부재에 대한 문제 만을 제기하고 해답을 보여주지 않는 잉마르 베리만의 대부분의 영화와는 달리 해피 엔딩의 결말을 가진 영화이지만 베리만 감독은 이 영화의 결말을 성급하게 보여주어 감상에 빠지지 않고 여운을 남김으로써 이 영화의 품격을 결코 떨어뜨리지 않는다.

아이작이라는 완고한 노교수의 짧은 여행과 회심이 얼핏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 속 스크루지의 회심과 닮아 있다. 그래서 더욱 호감이 가는 영화이기도 한데 꿈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모티브로서 죽음을 예견하는 꿈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결국 죽음에 이르는 여정의 영화라고 할 수 있으며, 반대로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는 여정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종착점으로 세상과의 화해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1958년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 아이작을 연기한 빅토르 쇠스트룀의 절제된 내면 연기의 뛰어남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베리만 이전에 등장한 스웨덴의 대표적인 감독이기도 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