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과 꿈 Apr 22. 2021

얼어붙은 땅을 걸어가는 22일간의 뜨거운 여정

- 베르너 헤어초크의 '얼음 속을 걷다'를 읽고

 신간 목록에서 베르너 헤어조크의 '얼음 속을 걷다'라는 책을 발견하는 순간 일종의 이끌림이 있었다. 우선 베르너 헤어초크(Werner Herzog)라는 영화감독이 쓴 책이라는 점이 색다른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두 번째로는 책의 제목이 주는 강한 인상이 있어서였다.

 베르너 헤어초크는 빔 벤더스, 라이너 베르너 파스벤더와 함께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뛰어난 감독이지만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작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처음 접하는 산문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베르너 헤어초크가 감독한 영화 '피츠카랄도'를 기억하고 있기에 더더욱 이 책의 내용이 궁금했었다. 영화 '피츠카랄도'는 페루의 밀림을 지나 인데스 산맥의 한 봉우리에서 오페라를 공연하고자 하는 피츠카랄도라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좋게 말하자면 불가능한 꿈을 좇는 한 남자의 야망과 의지에 관한 영화이고,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약간은 정상에서 벗어난 광기에 휩쓸린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아귀레, 신의 분노'와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에서도 광기에 사로잡혀 있거나 비정상적인 상황 아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처럼 베르너 헤어초크는 자신이 감독한 영화에서 언제나 문명을 비판하고 원시의 상태를 동경하는  주제를 추구해왔기에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궁금한 것이었다.


 1974년 헤어초크는 파리에 거주하는 영화평론가 로테 아이스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로테 아이스너는 '뉴 저먼 시네마'를 이끌었던 감독들이 아직 무명이었던 젊은 시절부터 이들의 새로운 영상 미학을 옹호하고 전파해왔던 여성 평론가였다. 따라서 그녀는 신경향의 젊은 감독들에게는 '뉴 저먼 시네마'의 정통성과 이론적 토양을 제공한 존재였기에 그녀의 소식은 헤어초크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에 헤어초크는 로테 아이스너의 쾌유를 비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뮌헨을 출발하여 파리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이 힘든 여정에 담긴 간절한 마음이 그녀를 살릴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그 발상이 역시 헤어초크다운 것이다. 이 책은 헤어초크가 자발적으로 행한, 뮌헨에서 파리에 이르는 22일간의 고통스러운 여정의 기록이다.

 11월 말 겨울에 들어선 중부 유럽 내륙지방의 춥고 음습한 기후가 헤어초크의 여정을 힘들게 한다. 많은 눈이 발걸음을 더디게 하다가 비가 섞여 내리는 진눈깨비에 한기가 지친 몸을 공격한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몰골에 잠자리 구하기가 여의치 않으면 창고에 숨어들어 지친 몸에 안식을 구하기도 한다. 

 원래 헤어초크는 이 여정을 책으로 낼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단지 작가로서의 습관처럼 여정을 기록한 것이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의 기록 속에 틈틈이 작가로서의 상상력이 불러내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책은 지식을 얻거나 교훈을 구하는 의도로 읽을 책은 아니다.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풍경이다. 헤어초크의 여정을 따라가는 시선이 한 편의 로드 무비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풍경을 드러낸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풍경을 따라가면서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 나그네'가 떠오른다. 음습한 대기를 날아다니는 까마귀는 '겨울 나그네'의 나그네를 따라다니는 재수 없는 까마귀를 연상케 한다. 책 속에서 까마귀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독일에서는 그만큼 흔한 새인가 보다. 하긴 독일의 민족 신화에서도 까마귀는 등장하고, 독일 제국의 문장과 국기에도 까마귀는 빠지지 않는다. 지금도 까마귀는 독일의 국조(國鳥)다. 이 책의 몽환적인 분위기 또한 '겨울 나그네' 속의 '세 개의 태양'이 묘사하는 몽환을 생각나게 한다. 헤어초크가 거쳐가는 낯선 지명을 브리태니커 출판사에서 나온 '아틀라스 세계 지도집'에서 확인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내용의 책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두껍지 않은 책의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다.

 "내가 걸어서 파리에 간다면 그녀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헤어초크의 믿음대로 로테 아이스너는 이후 8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잡초(雜草)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길잡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