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비 온 뒤의 화창한 날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오랜만에 야외로 나가 푸르고 맑은 대기와 짙어가는 숲의 푸르름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장모님 문병을 겸해 천안의 단대 호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드문드문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가족 단위로 봄을 호흡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잘 가꾸어진 녹지 공간이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공원과 연계된 문화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이만하면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누리는 삶의 질도 선진국에 비해 낮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방 자치제도가 잘 정착한 덕분입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던 1970년대는 지금과 비교하면 모든 것이 빈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산은 헐벗었고, 그나마 있는 나무도 가치 없는 잡목에 병충해에 병든 상태였습니다. 학교에서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 보면 어깨 위로 송충이가 툭 하고 떨어져 기겁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나무젓가락을 들고 병충해를 퇴치한다고 수업도 마다하고 산을 헤매고 다녔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당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수도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극심해서 지방의 문화 시설이라면 영화가 상영되거나 대중 가수의 쇼를 접할 수 있었던 극장이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지방자치단체가 그 지방의 특색을 잘 살린 특산물 축제에서부터 영화제, 미술제, 음악제가 지방에서도 자리 잡아 외지의 관광객을 부르고 있지만 말입니다.
특히 지방에서는 어린이날이라고 특별히 즐길 거리가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서울에 있는 동대문운동장이나 효창운동장(두 곳 모두 지금은 사라진 장소이지만)에서 펼쳐지는 어린이날 축하 행사를 TV를 통해 부럽게 바라보면서 어린이날을 간접 체험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덜했던 것이 책을 통한 경험이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물론 지역 간의 격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지역보다는 빈부의 격차에 따라 그 혜택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범람할 정도로 출판물이 풍부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서 독서를 위한 책은 그만큼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몇 권의 서적이 제대로 구색을 갖추게 된 것은 세계문학전집을 사게 되었던 고등학교에 가서였습니다.
다행히 '자유교양 경시대회'라는 것이 있어서 초, 중학교 시절의 부족한 독서의 공백을 많이 메워주었다는 기억입니다. 학교 내의 일부 학생 만이 대상이었지만 이 제도 덕분에 동국 별감, 강감찬 전, 박씨전 등 다른 경로로 섭득할 수 없었던 우리 역사와 옛이야기를 책으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 읽었던 책으로는 강소천, 마해송 선생의 우리 동화집이나 '피노키오', '삼총사', '아, 무정(장발장)', '소공녀', '쿠오레(사랑의 학교)' 등의 외국 소설이 얼핏 생각납니다.
특히 우리의 정서를 담고 있는 우리 창작 동화가 오래 기억에 남아 방정환 선생의 '만년 샤쓰', 마해송 선생의 '떡배 단배', 강소천 선생의 '꿈을 찍는 사진관'은 지금도 머릿속에서 생생한 동화입니다.
우리 동화는 아니지만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원제는 '피노키오의 모험')은 환상적이면서 모험적인 내용으로 해서 특히 좋아했던 동화였습니다. 책으로 읽는 '피노키오'도 좋았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피노키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음악으로 접했던 이탈리아 칸초네 '피노키오의 편지(Lettera a Pinocchio)'도 무척 좋아하는 노래였습니다. 물론 원작 동화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어서이겠지요.
귀엽고 사랑스러운 피노키오
내 행복했던 시절의 친구
내가 믿고 고백하곤 했던
내 비밀을 나누었던 친구
귀엽고 사랑스러운 피노키오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하네
새하얀 침대에서
널(책장을) 넘기고, 널 말하고, 꿈꾸었지
지금 넌 어디에 있니? 네가 보고 싶어
네가 사는 곳의 이야기가 궁금해
아마도 제페토 아빠와 함께 살겠지?
널 속였던 고양이는 어디에?
네게 말을 걸던 귀뚜라미는?
그리고 요정 투르치나는 어디에 있지?
내 모든 비밀의 친구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남아 주렴
그 옛날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노래는 제키노 도르(Zecchino D'Ore)'라는 일종의 동요 콩쿠르에서 1961년에 조니 도렐리(Johnny Dorelli)가 불러 입상한 이탈리아 칸초네입니다. 가사와 같이 어린 날의 추억을 아련하게 떠올리게 하는 노래로 조니 도렐리의 노래 이외에도 '나이도 어린데(Non Ho L'eta)'라는 노래로 유명한 질리오라 칭케티(Gigliola Cinquetti)와 소년 가수 로베르티노(Robertino)의 노래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유주용이 번안해 부르기도 했네요.
이 노래를 듣다 보니 피노키오뿐만 아니라 '삼총사'의 달타냥이나 '쿠오레'의 엔리코, 그리고 '떡배 단배'의 갑동이와 돌쇠 등 그리운 이름들이 떠오릅니다.